남자“돈 내기 아까워도 자존심 때문에…”
여자“생색 다 내놓고 이제 와서 돈 타령?”
연인들의 풀리지 않는 숙제이자 남성들의 오랜 불만거리였던 데이트비용. 남녀 사이 미묘한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데이트비용이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개그소재로 사용되면서부터다. 치사스럽다는 생각에 차마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남성들은 이제야 너도나도 공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여성들도 할 말은 있다. 한번쯤 데이트비용 문제로 고민했던 남녀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커피값은 내가 내고 쿠폰도장 네가 찍냐.”
KBS <개그콘서트> ‘남성인권보장위원회’의 어록 중 하나다. 여성 중심의 데이트를 소재로 한 이 코너는 특히 남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중에서도 많은 남성들이 공감하는 것은 데이트비용과 관련된 부분. 자신이 데이트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만 끙끙 앓던 남성들은 쾌재를 부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괜히 눈치를 봐야 하는 여성들 역시 할 말은 있다.
연애를 하고 있는 남녀라면 한번쯤은 고민해봤을 데이트비용 문제.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간 사이가 벌어질 것 같아서, 남자가 내는 게 당연하니까 등의 이유로 표면화되지 못하기도 했다.
사랑은 같이하고 돈은 내가?
지금의 여자친구와 2년째 교제 중인 대학생 이모(25)씨도 최근 불거진 논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씨는 “내가 데이트 비용을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됐지만 솔직히 지갑을 열 때마다 억울한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이씨가 데이트비용 부담에 불만을 품는 이유는 자신도 여자친구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능력이 없는 학생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에게 받는 용돈으로는 도저히 데이트비용을 충당할 수 없어 아르바이트까지 하고 있기도 하단다.
이씨는 “아르바이트로 받는 80만원을 모두 데이트 비용에 쓰고 있는 걸 알면서도 껌 한통도 내가 사주길 바라는 여자친구가 때로는 밉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직장인 정모(29)씨도 연애를 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데이트비용 갈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씨는 “우리 세대에서는 더치페이가 일상화됐는데도 유독 남녀의 만남에 있어서는 옛날 세대와 변한 게 없다”고 말했다. 최근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정씨는 연애를 하면서 다툰 이유 중 데이트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고 한다. 정씨는 “차마 말로 하기는 치사스럽지만 돈이 많이 드는 건 무조건 내가 내야 하고 적은 돈으로도 해결되는 건 여자친구가 내면서 있는 생색 없는 생색 다 내는 경우가 허다했다”며 “친구들을 만날 땐 100원 단위까지도 더치페이를 하면서 나와 데이트할 땐 계산법이 달라지는 여자친구를 볼 때마다 짜증이 났고, 그런 점이 모이고 정이 떨어지면서 결국 이별까지 가게 된 것 같다”고 전했다.
김모(30)씨는 여자 앞에서 남자다워 보이고 싶어 하는 남자들의 욕심이 데이트비용 논란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풀이했다. 김씨는 “남자들, 특히 한국 남자들 대부분은 여자에게 돈을 쓰게 하는 걸 남자답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여긴다”며 “그런 생각을 고치지 않는 한 내키지 않는 돈을 쓰는 일은 매번 되풀이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씨는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현재 여자친구와 2년 동안 사귀고 있는 김씨는 어느 순간부터 통장 잔고가 늘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월급 가운데 절반 정도가 데이트 비용에 들어가는 바람에 저축할 돈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생일이나 화이트데이 등 기념일이 있는 달엔 어김없이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단다.
결국 김씨는 자신의 상황을 솔직히 여자친구에게 말했다. 이에 여자친구는 더치페이를 제안했다. 왜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느냐는 따뜻한 말과 함께. 생각보다 ‘쿨’한 여자친구의 반응에 한 시름 놓았다는 김씨. 그러나 여자친구가 지갑을 열 때마다 김씨는 죄라도 지은 듯 한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혹시라도 돈을 내면서 자신을 찌질(?)하고 능력 없는 남자라고 흉보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났다.
여자친구가 계산을 할 땐 괜히 주변의 눈치까지 보게 됐단다. 김씨는 “‘얼마나 못났으면 여자가 계산하는 걸 보고만 있느냐’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것 같아 뒤통수가 따가웠다”며 “결국 자존심 때문에 경제적 부담은 감수하더라도 내가 돈을 내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데이트비용 문제로 여러 고민을 하고 있는 남성들. 그러면 여성들의 생각은 어떨까.
유모(27·여)씨는 최근 불거진 데이트비용 논란이 당황스럽기만 하다고 했다. 유씨는 “그렇게 돈 내는 게 불만이었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느냐”고 말을 꺼냈다. 어느 정도 데이트비용을 내고 있지만 남자친구가 더 많은 돈을 낸다는 이유로 큰소리 한번 못 쳤다는 유씨는 “돈 좀 낸다고 생색은 다 내놓고 이제 와서 여자들은 왜 얻어먹기만 하느냐고 따지는 건 너무 비겁한 것 아니냐”고 성토했다.
대학생 한모(23·여)씨는 “여자는 남자를 위해 꾸미는 비용이 들기 때문에 남자가 돈을 내야 한다”는 한 연예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고 말했다. 한씨는 “솔직히 여자들은 남자에 비해 데이트 준비 비용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며 “예쁜 모습을 보길 원하는 남자친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화장품이나 의상비용이 많이 들어가는데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좀 더 많이 부담해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여성들의 의견도 엇갈린다. 직장인 김모(29·여)씨는 “여자가 외모를 꾸미는 건 남자친구의 여부와 상관없는 일이다”라며 “‘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치장했으니 돈은 니가 내라’는 건 지나치게 남성에게 의존하는 사고방식이다”라고 비판했다.
데이트 통장까지 마련
직장인 이모(28·여)씨는 두 사람 모두 불만 없이 원만한 연애를 지속하기 위해 ‘데이트 통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씨는 “연애 초기엔 남자친구가 대부분의 데이트 비용을 냈는데 남자친구도 부담스러워 하고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아 각자 한 달에 20만원의 돈을 데이트 통장에 입금해 쓰고 있다”며 “여행을 가거나 기념일을 보낼 땐 남자친구가 내기도 하지만 남자친구는 그렇게 한번씩 목돈을 부담하는 것에 묘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돈을 내는 남자에게도, 계산대 앞에 설 때마다 고민에 빠지는 여자에게도 데이트비용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한 연애상담 전문가는 “불황이 지속되고 여성들의 경제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마음속에만 담아뒀던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며 “금전적인 부담이 사랑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연인 간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라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