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현역 최고령 노장 감독으로 알려져 있는 정지영 감독이 또 하나의 역작을 써냈다.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내 이름은>이 개봉과 동시에 입소문을 타며 흥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78주년이 된 이번 4월, 영화는 오래 묻혀 있던 그날의 역사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중이다.
정지영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 온 대표적인 사회파 감독이다. 현재 80세로 한국 영화계에서 사실상 최고령 현역이다. 1946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난 정 감독은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뒤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김수용 감독 밑에서 조연출로 활동하며 현장 경험을 쌓았고, 1982년 영화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했다.
사회파 감독
노장의 파워
데뷔 이후 초기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1990년 영화 <남부군>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성과를 거두며 정 감독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이어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을 연출하며 199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정 감독의 작품들은 전쟁, 이데올로기, 개인의 삶을 다루며 현실과 밀접한 소재를 선택하는 특징을 보였다.
다만 1990년대 후반 <블랙잭> 등 일부 작품의 흥행 부진 이후 한동안 연출 활동이 뜸해졌다. 약 10년에 가까운 공백기 동안 한국 영화산업은 대기업 중심의 투자·배급 구조로 빠르게 재편됐고, 상업영화 중심의 제작 환경이 자리 잡았다. 이 시기 정 감독은 영화 연출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이후 2012년 영화 <부러진 화살>로 복귀하며 다시 주목을 받았다. 정 감독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는데 사법 사건, 금융 문제, 국가 폭력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영화로 다뤘다.
그 대표작 중 하나인 영화 <부러진 화살>은 정지영 감독의 복귀작이자, 그가 대중적으로 다시 주목받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약 10년간 연출 공백을 가졌던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
이 영화는 2007년 발생한 이른바 ‘판사 석궁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대학 재임용 문제를 둘러싼 소송에서 패소한 교수가 담당 판사를 찾아가 석궁을 쏜 사건을 바탕으로, 재판 과정과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배우 안성기가 주연을 맡아 사건의 당사자를 연기했다.
<부러진 화살>은 제작비 약 5억원 규모의 저예산 영화로 제작이 시작됐지만, 개봉 이후 빠르게 관객을 끌어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개봉 직후 손익분기점을 넘어섰고, 최종 관객 수는 300만명을 돌파하며 기대 이상의 성과를 기록했다. 대형 배급사의 지원 없이 입소문을 통해 흥행하며 주목받았다.
흥행과 함께 영화는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작품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모순과 사법부의 권위적인 태도를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반면 비판도 적지 않았다. 영화가 특정 시각에 치우쳐 사건을 재구성했다는 지적과 함께, 법적 해석을 왜곡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사법·금융·국가 폭력까지
실제 사건 통해 사회 재조명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블랙머니>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정 감독이 2012년 <남영동 1985> 이후 약 7년 만에 선보인 작품이다. 2000년대 초반 발생한 ‘론스타 외환은행 매각 사건’을 모티브로, 금융 권력과 사법 시스템을 둘러싼 문제를 다룬 범죄물이다.
작품은 외환위기 이후 외환은행이 해외 사모펀드 론스타에 매각되는 과정과, 이후 벌어진 배당 및 재매각 과정을 배경으로 했다. 해당 사건을 중심으로 검찰 내부의 갈등과 수사를 따라가며, 금융 시스템과 권력구조의 문제 서사로 풀어냈다.
금융 비리를 추적하는 검사로, 배우 조진웅이 주연을 맡았다. 극은 사건을 파헤치는 수사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관련 인물 간의 이해관계와 충돌을 통해 긴장감을 형성했다.
영화는 실화 기반 작품이라는 점에서 개봉 당시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 이후 정 감독은 다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이어가며, 공권력과 개인의 관계를 다룬 영화 <소년들>을 선보이게 된다. <소년들>은 정 감독이 2023년에 선보인 작품으로, 1999년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에서 발생한 이른바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해당 사건은 당시 강도치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청소년 3명이 수사 과정에서 범인으로 특정돼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이후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는 사건 발생 이후 수사 과정과 이후 재수사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극의 주요 흐름은 억울하게 범인으로 지목된 소년들과, 사건을 다시 조사하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사건 초기 수사에서 피의자들이 어떻게 특정됐는지, 이후 사건이 어떤 경로를 거쳐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됐는지 등이 순차적으로 그려진다.
작품은 여러 인물의 시점을 통해 사건을 전개하는 방식을 택했다. 실제 사건에서는 특정 인물이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는 구조가 명확하지 않았던 만큼, 영화에서는 사건을 따라가는 중심 인물을 설정해 서사를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형사 캐릭터가 주요 축으로 등장하며, 배우 설경구가 역할을 맡았다. 형사 캐릭터는 사건 당시 수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 인물로 설정돼있으며, 이후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극은 해당 인물이 사건을 재검토하는 과정과, 관련 인물들을 만나며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가는 흐름으로 전개된다. 이를 통해 사건의 초기 수사 과정과 이후 재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연결하는 구조를 갖는다. 이와 함께 영화는 억울하게 범인으로 지목된 소년들의 상황을 중심에 두고 전개된다.
실제 사건
모티브 전문
사건 당시 청소년이었던 이들은 수사 과정에서 범인으로 특정됐으며, 이후 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됐다. 영화는 이들의 시점과 상황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며 사건의 흐름을 구성했다.
시간이 흐른 뒤 사건이 다시 검토되는 과정과,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는 과정까지를 포함한다. 작품에는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는 인물, 법률 관계자 등 여러 인물이 서사에 포함되며, 사건의 전개 과정을 다각도로 보여줬다.
영화에는 배우 조진웅도 출연해 주요 인물 중 하나를 맡았다. 그는 사건과 관련된 역할로 등장하며, 극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장면에 관여한다. <소년들> 역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또 최근 정 감독이 내놓은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내 이름은>도 입소문을 빠르게 타고 있다. 영화는 촌스러운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하는 18세 소년 ‘영옥’과, 오래전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가는 어머니 ‘정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모자 이야기지만, 영화는 두 사람의 삶을 따라가며 점점 과거의 한 사건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영옥은 학교에서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내지만, 자신의 이름이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늘 불만을 품고 있다.
별것 아닌 고민처럼 보이지만, 그 이름을 둘러싼 감정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특히 서울에서 전학 온 학생이 등장하면서 교실 분위기가 달라지고, 관계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힘으로 질서를 잡으려는 전학생이 등장하면서 교실은 점점 긴장 상태로 변해간다.
반면 어머니 정순은 겉으로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지만, 특정한 계절이나 상황이 되면 이유 없이 쓰러지거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증상을 보인다.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 대부분을 잃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으며, 왜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영화는 이런 정순의 상태를 단서로 삼아 점차 과거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이 작품은 1998년과 1949년, 두 개의 시간을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현재의 교실과 과거의 제주가 교차되면서, 서로 다른 시대의 사건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정 감독은 이 같은 구성에 대해 “처음부터 4·3 사건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은 어렵다고 생각했다”며 “그래서 관객이 따라가면서 ‘찾아가게 만드는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영화는 사건의 전개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인물의 기억과 감정을 통해 과거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 정순이 떠올리는 기억 속에는 보리밭을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의 모습과 함께, 설명되지 않는 폭력의 장면들이 단편적으로 등장한다.
아픈 역사
제주 4·3
군인들의 움직임, 외부에서 들어온 인물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충돌 등은 사건의 전체를 보여주기보다는 분위기와 감정으로 전달된다.
정 감독은 “끔찍한 국가 폭력을 갑자기 보여주면 관객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그래서 현재의 학교 이야기를 하나의 완충지대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과거 제주에서 벌어진 사건을 나란히 배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는 ‘폭력’이다. 다만 자극적으로 소비되는 폭력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확대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정 감독은 “폭력은 외부에서 새로운 질서를 강요할 때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며 “국가든, 사회든, 학교든 그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영옥이 겪는 교실 내 갈등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가 힘으로 질서를 만들고, 다른 학생들은 그 흐름에 휩쓸린다. 처음에는 사소한 갈등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집단적인 형태로 변해간다. 영화는 이 같은 과정을 통해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상황을 연결한다. 이야기의 또 다른 중심에는 ‘이름’이 있다.
영옥은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정순은 그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 이름이 불쑥 떠올랐다”는 정도의 설명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이름은 과거와 연결된 중요한 단서로 드러난다.
정 감독은 “이 영화는 4·3의 이름을 함께 찾아가는 이야기”라며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난 뒤 ‘4·3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보게 되길 바랐다”고 밝혔다. 실제로 영화는 특정한 결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에 가깝다.
제작 과정 역시 일반적인 상업영화와는 달랐다. 이 작품은 대형 투자사의 지원 없이 크라우드 펀딩으로 시작됐다. 약 1만명에 가까운 시민이 참여해 4억원이 모였고, 이를 기반으로 제작이 진행됐다. 정 감독은 “이 영화에는 특정 투자자가 없다”며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만든 영화”라고 강조했다.
이어 “요즘 시세로 보면 60억에서 70억은 들어가야 하는 작품인데, 배우와 스태프, 심지어 나까지 모두 희생하면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제작 여건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만큼 참여자들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작품이다.
베를린영화제 초청…독립·예술 1위
화제작 <내 이름은>…개봉 흥행 기류
주연은 염혜란 배우가 맡았다. 정 감독은 캐스팅 과정에 대해 “이전 작품에서 짧게 함께 작업했는데, 연기를 보고 반했다”며 “다음 작품은 무조건 같이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번에는 아예 주인공으로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했다.
이어 “연기가 굉장히 리얼하고 맛깔난다”며 “이 인물은 배우가 완성했다고 봐도 된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정순이라는 캐릭터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모두 끌고 가는 중심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는 개봉 전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되며 해외에서 먼저 공개됐다. 정 감독은 “영화를 만들고 나서 스스로 잘 만들었다는 확신이 없었다”며 “제작비도 충분하지 않았고 마음대로 찍은 것도 아니어서 불안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베를린에서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어 안도했다”고 말했다. 국내 개봉 이후에는 독립·예술영화 부문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는 등 긍정적인 관객 반응도 이어졌다. 특히 상영관 수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도 관객을 끌어모았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된다.

개봉 당일인 지난 15일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일반 관객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이날 관람은 ‘문화의 날’을 맞아 마련된 자리로, 대통령 부부가 시민들과 함께 상영관을 찾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사전에 신청을 받아 선정된 관객 약 160여명이 함께 자리했으며, 상영 전후로 감독과 배우들이 참여한 무대 인사도 이어졌다.
이 대통령은 상영 이후에 무대에 올라 “국가 폭력에 의한 피해는 학살과 다름없다”며 “이 같은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두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어 “영화가 인간성을 회복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며 관람을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함께 자리한 김혜경 여사 역시 “영화를 보는 동안 제주 4·3 희생자 유가족이 떠올랐다”고 소감을 전했다.
다만 정 감독은 이 같은 정치권의 관심과 작품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제작을 시작한 작품”이라며 “개봉 시기와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그렇게 보일 수는 있지만, 단순히 타이밍이 맞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4월은 제주 4·3을 다시 생각해 볼 시기라고 생각한다”며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관객들과 만나는 시점은 적절하다고 본다”고 부연했다.
해외서도
호평 일색
정 감독은 이번 작품을 ‘대중 영화’라고 규정했다. 그는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며 “무겁기만 한 영화가 아니라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작품이 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영화를 통해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사람으로,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마무리했다.
<imsharp@ilyosis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