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김병기·한동훈, 떠나는 정치와 남은 정치

2026.01.21 09:12:08 호수 0호

강 위의 달, 적벽부가 묻는 정치 태도

정치는 같은 징계 앞에서도 서로 다른 선택을 만들어낸다. 김병기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제명이 예정된 국면에서 지난 19일 스스로 탈당을 선택했고,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13일 윤리위원회의 제명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같은 ‘퇴장 압박’이지만, 선택의 방향은 정반대였다.

김병기는 남아 다투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재심도, 표결도, 정치적 확전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유리했을지도 모를 절차의 시간을 스스로 접었다. 반면 한동훈은 제명 결정이 내려진 뒤 이를 ‘조작 감사’이자 ‘정치적 보복’으로 규정하며 공개 반발에 나섰다.

당의 결정에 맞서 싸우겠다는 선택이었다.

여기서 옳고 그름을 즉각 가를 수는 없다. 절차적 정당성을 다툴 자유도, 억울함을 주장할 권리도 정치의 일부다. 문제는 다른 지점에 있다. 정치가 언제 설명을 확장해야 하는가, 그리고 언제 침묵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이다.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의 선택은 분명히 갈렸다. 한 명은 표현을 절제하는 선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대응을 확장하는 선택이었다.


정치에서 표현은 언제나 힘과 책임을 동시에 가진다. 설명이 과잉될수록 정보는 늘어나지만, 설득은 오히려 희석된다. 절차가 길어질수록 정의가 선명해지기보다 피로가 축적된다. 김병기는 이 구조를 본 것 같다. 그는 자신의 명분을 끝까지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정치가 더 소모되지 않도록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질문 앞에서 1000년 전의 한 사람이 떠오른다. <적벽부>를 쓴 북송의 문인 소동파다. 그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뒤 강 위에 섰다. 투옥과 유배, 정치적 낙인은 이미 그의 이력서에 찍혀 있었다. 오늘의 기준으로 봐도 반전은 거의 불가능한 처지였다. 제도는 그를 다시 부를 생각이 없었고, 권력은 이미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동파는 끝까지 해명하지 않았다. 억울함을 정리한 탄원서를 쓰지도, 자신을 몰아낸 권력을 저주하지도 않았다. 그는 배를 띄웠고, 밤을 건너며 달을 불렀다. 정치가 설명하지 못하는 시간을 끌어왔다. <적벽부>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것은 패배 선언이 아니라, 떠나는 자의 태도였다.

<적벽부>에 나오는 손님은 인간의 삶을 하루살이에 비유한다. 거대한 강과 하늘 앞에서 인간의 존재는 찰나에 불과하다는 자각이다. 이는 패배자의 체념이 아니라, 권력의 크기를 상대화하는 사고다. 인간이 붙잡고 있다고 믿는 지위와 명예가 실은 잠시 머무는 자리일 뿐임을 드러내는 인식이다.

권력이 영원하다는 착각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이 지점에서 김병기의 선택은 다시 읽힌다. 그가 남아 있었다면 더 많은 항변과 해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더 많은 항변, 더 많은 지지 호소, 더 긴 절차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설명과 공방은 결국 정치의 소음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그 소음을 확장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이것은 결백의 포기가 아니라, 정치의 총량을 더 키우지 않겠다는 판단이었다.

반대로 한동훈의 선택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는 왜 끝까지 남아 싸우는 방식을 택했는가. 그것은 억울함 때문일 수도 있고, 정치적 명분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선택은 필연적으로 당내 갈등을 연장시키고, 정당의 시간을 소모시킨다. 대응이 확장되는 순간, 정치는 설명의 공간이 아니라 대치의 무대로 바뀐다.

정당은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 전선의 일부가 된다.

우리 정치에는 다른 전례도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차례 정치적 축출과 감금, 사형 선고와 망명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매번 즉각 맞서 싸우기보다 시간을 건너는 방식을 택했다. 거리에서 외치는 대신 침묵했고, 법정에서 다투는 대신 해외로 나갔다. 떠남은 후퇴가 아니었고, 침묵은 포기가 아니었다.


그는 싸움을 유예했고, 그 유예 속에서 정치의 지형이 바뀌는 순간을 기다렸다.

김대중의 정치는 ‘버티는 정치’가 아니라 ‘견디는 정치’에 가까웠다. 그는 남아 소모되지 않았고, 떠나 잊히지도 않았다. 돌아왔을 때 그는 개인의 억울함을 앞세우지 않았다. 대신 구조의 전환, 시대의 비전을 들고 돌아왔다. 그때 그의 정치적 복귀는 복수가 아니라 대안이 됐다.

소동파는 물과 달을 예로 든다. 흐르는 것은 사라지지 않고, 반복되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순환이라고 말한다. 떠남은 끝이 아니라 이동이다. 문제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떠나느냐다. 적벽의 밤에서 소동파는 권력을 붙잡지 않았지만, 태도를 남겼다. 김대중은 권력을 유예했지만, 시간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정치는 흔히 끝까지 버티는 것을 책임으로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절차를 늘리고, 갈등을 키우고, 공동체를 피로하게 만드는 버팀은 책임이 아니라 부담이 된다. 김병기의 퇴장은 이 점에서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왜 내려놓음은 늘 패배로만 해석되는가. 왜 떠나는 선택은 언제나 변명처럼 취급되는가.

물론 한동훈에게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 싸우는 정치가 언제까지 유효한가, 그리고 그 싸움이 공동체에 무엇을 남기는가. 끝까지 남는 정치가 언제부터 용기가 아니라 집착이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적벽부>의 마지막은 이렇게 서술돼있다.

“술은 다하고, 사람들은 배 위에 잠든다. 모든 흥분은 그렇게 사그라지고, 남는 것은 소란이 아니라 조용히 가라앉은 시간의 여운이다.”

정치도 다르지 않다. 결국 모든 국면은 종료되고, 모든 절차는 끝난다. 그때 남는 것은 누가 더 오래 버텼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적게 훼손했는가다. 김병기는 떠남으로 소음을 줄였고, 한동훈은 남음으로 싸움을 택했다. 어느 선택이 더 긴 시간을 통과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적벽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강 위의 달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끌어내릴 수도, 소유할 수도 없다. 정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아래를 어떻게 지나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뿐이다. 떠나든, 남는 정치든. 오늘의 정치는 이제 그 메시지를 다시 새겨야 한다.

김병기 전 원내대표와 한동훈 전 대표가 한강 나루터에서 <적벽부>를 펼쳐 들고 달을 바라보며, 각각 지금까지 무엇을 붙잡고 있었는지, 지금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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