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박정원 기자 =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미저리> <어 퓨 굿 맨> 등을 연출하며 할리우드의 전설로 불려온 롭 라이너(78) 감독과 그의 아내 미셸 싱어 라이너(68)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돼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과거 심각한 약물중독을 겪었던 친아들 닉 라이너(32)가 지목되면서, 미국 사회를 좀먹고 있는 마약 문제의 심각성도 다시금 대두되고 있다.
15일(현지시각) <CNN> <피플지> <TMZ>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라이너 감독 부부는 지난 14일 오후 3시30~40분께 LA 브렌트우드의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대와 경찰은 두 사람의 시신에서 흉기에 찔린 것으로 보이는 열상을 확인했으며, LA 경찰은 사건을 ‘명백한 살인사건’으로 규정하고 강력계에 수사를 의뢰했다.
외신들은 사망 사실을 처음 확인한 인물이 부부의 막내 딸 로미 라이너(28)라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라이너 부부는 이날 오후 자택에서 마사지를 받기로 돼있었으나, 약속 시간에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이를 수상히 여긴 테라피스트가 가족에게 연락했다. 이후 로미가 집을 찾으면서 참혹한 현장이 드러난 것으로 전해졌다.
사건 전날 밤, 라이너 부부는 둘째 아들 닉 라이너(32)외 함께 방송인 코난 오브라이언의 홀리데이 파티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가족 간에 언성이 오가는 격렬한 언쟁이 벌어졌고, 주변 참석자들 역시 이를 알아챌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파티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피플지>에 “닉이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 정도로 과하게 흥분해 있었고, 사람들에게 계속 ‘당신 유명인이냐’고 묻는 등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였다”고 증언했다. 언쟁 이후 라이너 부부는 파티장을 먼저 떠났고,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은 다음 날 오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경찰은 둘째 아들 닉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해 체포했으며, 그가 살인 혐의로 기소돼 현재 보석 없이 구금된 상태라고 전했다. 다만 수사 당국은 구체적인 범행 동기와 경위, 그리고 공식적인 사인은 “조사 중”이라며 공개를 미루고 있다.
사건은 아직 수사 단계로, 닉 라이너에게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된다.
외신들은 이번 사건을 전하며, 용의자로 지목된 아들 닉이 과거 10대 시절 심각한 약물중독과 정신건강 문제를 겪어왔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닉은 2016년 <피플지>와의 인터뷰에서 “10대 초반부터 약물에 의존했고, 15세 무렵부터 재활시설을 전전했다”며 오랜 중독과 노숙 생활을 고백한 바 있다.
이 같은 경험은 2015년 부친 롭 라이너가 연출하고 닉이 공동 각본을 맡은 영화 <비잉 찰리>의 바탕이 됐다. 당시 라이너 가족은 인터뷰를 통해 “아들의 중독과 재활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가족 모두에게 큰 고통이었다”며 “약물중독 문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개인의 일탈을 넘어 미국 내 만연한 마약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약물중독으로 인한 가정 파괴와 강력범죄는 현재 미국 사회의 가장 큰 뇌관 중 하나다.
실제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내 약물 과다복용 사망자가 약 8만명으로 추정되며, 이 중 4만8000여건이 합성 오피오이드(마약성 진통제) 사용자였다. 합성 오피오이드는 펜타닐처럼 적은 양으로도 강력한 효과를 내는 물질로, 최근 몇 년간 미국에서 급격히 확산되며 치명적인 피해를 낳고 있다.
미국 사회에선 장기화된 경기침체와 팬데믹 이후의 정신건강 악화, 불법 펜타닐 유통 확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약물중독과 과다복용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치료 인프라 확충과 정신건강 서비스 강화, 오피오이드 처방 및 불법 유통 관리가 동시에 이뤄지지 않는 한 ‘숨은 피해자’는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경고도 잇따른다.
1947년 뉴욕에서 태어난 롭 라이너는 코미디 배우이자 감독이었던 고 칼 라이너의 아들로, 1960년대 코미디 작가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이후 1970년대 TV 시트콤 <올 인 더패밀리>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고 1984년 모큐멘터리 형식의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로 영화감독 데뷔에 성공했다.
성장 드라마 <스탠 바이 미>(1987),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스티븐 킹 원작 스릴러 <미저리>(1990), 법정 드라마 <어 퓨 굿 맨>’(1992), 인생 드라마 <버킷 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2007) 등 다양한 장르에서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최근까지도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의 속편 제작에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작가인 부인 미셸 라이너와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작업하던 1980년대 후반 인연을 맺어 1989년 결혼했으며 슬하에 제이크, 닉, 로미 세 자녀를 뒀다.
고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 동료 감독들과 배우, 정치·문화계 인사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며 애도를 표하고 있다. <미저리>에서 주연을 맡아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캐시 베이츠는 “고인은 내 인생을 바꿔준 예술가였다”며 “정말 끔찍한 소식”이라고 전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에 “롭이 전한 모든 이야기의 바탕에는 인간의 선함에 대한 깊은 믿음과 그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평생의 헌신이 있었다”며 “롭과 미셸은 그들이 싸워온 가치와 그들이 영감을 준 수많은 사람에 의해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애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라이너 감독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스릴러, 법정극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대중과 평단의 지지를 동시에 받은 감독”이라며 “특히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영화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로맨틱 코미디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라이너 감독의 죽음을 “‘트럼프 발작 증후군’이라는 정신병에 걸려 다른 사람의 분노를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트럼프는 “트럼프 행정부가 위대한 목표와 기대치를 모두 뛰어넘고, 어쩌면 전례 없는 미국의 황금기가 오면서 그의 명백한 편집증은 새로운 정점에 도달했다”고 비꼬면서도 “롭과 미셸이 평안히 쉬기를 바란다”고 애도했다.
해당 입장 표명과 관련해 <AP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과 대립각을 세웠던 피해자들을 향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정치적 공격을 퍼부었다”고 비판했다. 롭 라이너는 민주당의 열성 지지자였다.
라이너 가족 측은 대변인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슬픔 속에 있다”며 “진행 중인 수사와 관련해 사생활을 존중해달라”고 요청했다.
<jungwon933@ilyosis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