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스테이블코인, ‘새 문명의 문’이 열리다

2025.12.06 09:00:00 호수 0호

디지털 화폐의 흐름이 더 이상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전략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은 지금 그 문턱에 서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그간 기술적 용어와 복잡한 구조 때문에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이제는 한국 경제 전체의 구조적 변화를 결정짓는 핵심 이슈가 되고 있다.



지난 1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스테이블코인의 화폐금융사적 의의와 한국의 대응전략’ 포럼은 이 같은 흐름을 분명히 드러낸 자리였다.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은 가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설계된 디지털 화폐(암호자산)다.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이더리움처럼 하루에도 수십 %씩 가격이 변동하는 것이 아니라, 달러·유로·엔화처럼 안정된 가치를 유지하기 때문에 금융상품의 기반 자산 등에 쓰기 적합하다.

스테이블코인은 왜 새 문명 전환인가

포럼에서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은 스테이블코인을 ‘통화·금융 문명의 전환점’으로 규정하며, 이는 단순한 기술이나 투자상품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디지털 화폐 전략을 전개하고 있는 현 상황을 ‘디지털 화폐 패권 경쟁’으로 진단했다. 특히 미국이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하며 새로운 금융 인프라 체계를 구축하는 동안 한국이 뒤처질 경우 경제 협력의 축이 중장기적으로 중국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이번 포럼은 국민의힘 박수영 의원이 공동 주최하고 송언석 원내대표가 축사에 참여하면서 정치권도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는 국면을 만들었다. 행사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모두 스테이블코인을 국가 전략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날 논의는 한국이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자리였다.

미국은 왜 스테이블코인을 택했나

김덕태 고등지능원장은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정책 전환을 ‘트리핀 딜레마’ 대응 전략과 연결지었다. 미국이 글로벌 달러 공급을 유지하면서도 재정 적자의 부담을 완화하려는 선택이 바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라는 것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미국 국채 수요를 높여 재정 부담을 완화하고, 글로벌 결제시장에서 미국의 우위를 재확인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미국이 CBDC(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법정 디지털화폐)를 사실상 금지한 것도 이 같은 전략적 계산의 결과로 해석된다. 정부가 모든 거래를 직접 감시하는 구조는 미국식 자유주의와 충돌하며,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시장 생태계에 훨씬 부합한다는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이후 의회를 통과 중인 ‘지니어스법’은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발행·감독의 기준을 법제화하는 핵심 법안이며, 이는 글로벌 디지털 금융 패권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전략의 일부다.

이런 선택은 미국이 단순히 새로운 결제수단을 만든 것이 아니라, 금융·경제·지정학적 전략 전체를 디지털 기반으로 옮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정책은 기술이 아니라, 국가전략의 문제며, 한국 역시 이 구도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선택해야 한다.

2026년 한국의 법제화

한국은 이미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의 초기 단계에 들어섰다. 디지털자산기본법 적용, 원화 스테이블코인(WSC) 논의, 2026년 시행을 목표로 한 법안 작업 등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여야와 정부가 동일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은 매우 이례적이며, 정책 추진 가능성을 크게 높이는 요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감독체계의 설계다. 금융위원회가 맡을 경우 금융 규제 중심의 구조가 강화되고, 한국은행이 감독 주체가 될 경우 통화정책 중심의 프레임이 강화된다. 새로운 감독기구가 만들어질 경우, 한국 금융 질서의 중심축 자체가 이동하는 ‘보이지 않는 권한 재배치’가 일어날 수 있다.

포럼의 종합토론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금융시장 안정, 환율정책, 국제통화체제에 미칠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스테이블코인이 금융 인프라 구조 자체를 바꾸는 변화기 때문에 감독체계의 정교성, 재정준칙의 엄격한 적용, 금융·통화당국 간 긴밀한 협력 등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2026년은 이런 변화가 제도적으로 구현되는 첫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은행·보험·핀테크, 스테이블코인 동맹 전쟁

법·제도 논의보다 시장이 먼저 움직였다. 교보생명은 서클의 블록체인 네트워크 ‘아크(Arc)’ 테스트넷에 참여하며 보험사가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구축의 실제 플레이어로 나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조각 투자 플랫폼 참여까지 고려하면, 교보생명은 전통적 생보사를 넘어 디지털 자산 기반 종합금융사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은행권도 발 빠르다. 하나금융은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와 협력해 블록체인 기반 해외 송금과 외국환 혁신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는 WSC 생태계를 선점하려는 전략적 포석이다. 네이버파이낸셜·두나무·하나금융으로 이어지는 연합은 빅테크의 ‘은행 부재’와 전통 금융사들의 ‘디지털 인프라 약점’을 보완하며 새로운 금융 질서의 중심을 노리고 있다.

핀테크 기업도 뛰어든다. 헥토이노베이션은 ‘월렛원’ 인수와 서클 아크 생태계 합류를 통해 지갑·정산·규제준수(VASP)를 통합 제공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며 스테이블코인 시대의 핵심 인프라 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시장은 이미 새 질서를 짜기 시작했고, 이런 민간 동맹의 움직임이 한국형 스테이블코인 체계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가 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통화정책 바꾼다

박성준 동국대 블록체인연구센터장은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이 기존 통화정책의 틀을 근본적으로 흔든다고 진단했다.


지금은 협의통화·광의통화(M1·M2)를 기준으로 시중 유동성을 파악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이 확대되면 온체인 기반의 새로운 유동성 계층이 등장한다. 이는 중앙은행이 기존 방식으로는 시장 전체의 유동성을 파악하기 어려워지는 구조적 문제를 낳는다.

박 센터장은 법정통화·스테이블코인·온체인 자산으로 구성된 ‘3층 통화구조’가 한국 금융시스템에 자리 잡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구조가 현실화될 경우 한국은행의 정책 수단과 규제 프레임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진다. 이는 단순한 결제 혁신이 아니라, 통화정책 모델 자체의 재설계를 요구하는 흐름이다.

이 변화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모든 중앙은행이 직면한 도전이다. 모든 거래 내역을 블록체인에 직접 기록하는 방식인 ‘온체인’ 유동성의 비중이 커질수록 국가 경제 전체가 기존의 정책수단만으로는 통제하기 어려운 구조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화정책 혁신은 필연적 과제가 된다.

위험과 과제

김기흥 명예교수와 전선애 교수는 글로벌 스테이블코인(GSC)과 원화 스테이블코인(WSC)의 구조적 취약성을 지적했다. 스테이블코인이 1코인=1달러 등 고정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준비자산의 안전성이 핵심이지만, 민간기업이 이를 운용할 경우 시장 변동성과 신용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담보가치가 흔들리면 코인 가치도 즉시 불안정해지는 구조적 약점이 존재한다.

특히 WSC가 기존 외환규제를 우회해 자본유출의 새로운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WSC가 도입될 경우 해외와의 디지털 유동성이 확대되면서 환율 변동성 역시 커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는 한국처럼 개방도는 높지만 외환시장 규모가 제한된 국가에서 더 큰 충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동시에 GSC 확산은 민간 플랫폼과 글로벌 기술기업의 금융 영향력이 증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는 금융안정성 측면에서 새로운 리스크 요소가 되며, 감독체계와 대응전략의 재설계를 요구하는 지점이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의 성공 여부는 준비자산의 안전성과 감독체계의 정교함에 달려 있다.

한국은 어떤 길 선택해야 하나

결국 질문은 하나다. 한국은 어디에 설 것인가. 필자는 한국이 지금 세 가지 전략적 선택 앞에 서 있다고 본다.

첫째는 미국 중심의 달러 스테이블코인 질서에 편입돼 글로벌 금융 질서와의 연계를 강화하는 길이다. 둘째는 WSC를 구축해 자국 통화의 위상을 강화하는 길이며, 이는 금융 주권과 직접 연결된다. 셋째는 중국 디지털 위안화 체제와의 경쟁 또는 병존을 선택하는 길이다.

이 세 가지 선택은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전략·통화주권·외환 질서의 문제다. 과거에도 한국은 세계 금융 질서의 변화 앞에서 선택을 강요받았지만, 지금의 변화는 훨씬 더 구조적이고 속도도 빠르다. 기술·금융·외교가 동시에 재편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선택은 향후 10년 경제구조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핵심은 속도와 질서의 균형이다. 너무 느리면 기회를 잃고, 너무 빠르면 위험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해진다. 이 균형을 누가 어떻게 잡느냐가 한국 금융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다.

포럼에 참석했던 세지홀딩스 정홍술 회장은 필자와 통화에서 “정부와 금융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공론화해야 하는데 밥그릇 싸움하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시작됐다

포럼과 법제화 흐름을 종합하면,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한국 금융의 현재에 들어와 있다. 2026년은 이 변화가 제도적 형태로 본격화되는 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스테이블코인은 기술이 아니라, 경제구조, 통화정책, 외환 질서, 국가전략의 변화를 모두 촉진하는 문명의 전환점이다. 한국이 이 변화의 문을 스스로 열 것인지, 아니면 남이 만든 질서를 따라갈 것인지는 앞으로의 한국 경제를 결정할 중요한 변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택이 아닌 준비며, 그 준비의 속도가 한국의 미래 위치를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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