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여의도의 점심 정치학

2025.11.26 08:52:45 호수 0호

정치인에게 “요즘 가장 중요한 시간이 언제냐”고 물으면, 대부분 아침도 아니고 밤도 아닌 ‘점심’이라고 말한다.



한때 여의도의 정치 일정표에서 저녁 술자리는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저녁 회동에서 사람이 결정되고, 술이 돈독함을 만들고, 진심이 오갔다. “밤에 정치하고 낮에 발표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2025년 여의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저녁은 더 이상 정치의 시간대가 아니다. 저녁 술자리를 꺼리는 시대, 음주 관행이 약화된 시대, 정치인의 사생활과 윤리 기준이 한층 더 까다로워진 시대에 중요한 대화의 중심축은 점심으로 옮겨갔다.

흥미로운 것은, 이 변화가 단순한 라이프스타일 변화 수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점심(點心)’의 한자어 본래 의미가 다시 현재의 정치구조와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침과 저녁은 모두 순우리말인데 점심만 유독 한자인 이유는 원래 점심이 ‘큰 식사’가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조선시대에 점심은 정식 식사라기보다 속을 달래기 위한 가벼운 간식을 뜻했고, 그래서 마음 심(心)에 점(點)을 찍는다는 글자를 쓰게 됐다.

즉 점심은 원래부터 부담 없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고, 속내를 교환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현대 정치가 점심으로 옮겨온 것은 단지 음주문화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 점심이라는 시간대의 원초적 기능이 다시 소환된 것이다.


여의도 점심 시간을 보면 점심 정치의 힘을 실감한다. 여의도역과 국회 앞 상가 골목에는 정당 보좌진, 의원실 관계자, 기자, 공천을 노리는 출마자, 조직을 관리하는 핵심 실세들이 빠른 속도로 줄지어 이동한다. 스파게티집, 국밥집, 중식당, 호텔 라운지, 카페 라운지까지 모두 정치 일정표에 포함된다.

각 테이블마다 낮은 목소리로 ‘누구 얘기’ ‘공천 얘기’ ‘비명·친명 얘기’ ‘구청장 경쟁 구도’를 말하며 숟가락을 움직인다. 길게 앉아 술잔을 기울일 필요도 없다. 국회 본회의와 상임위 일정 사이에 맞춰 40~50분 정도의 점심이 가장 효과적인 대화 시간이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이 시간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어느 의원이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지, 누가 동석했는지, 어떤 인물이 불쑥 나타났는지, 이들의 자리 배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빠르게 읽는다.

특히 내년 지방선거 공천 국면에서는 점심 정치가 위험할 정도로 예민해진다. 공천을 노리는 자들에게 점심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누구와 점심을 했느냐”는 여의도에서 가장 무서운 정치적 신호다.

예컨대 공천 관계자와 점심 한 끼 먹는 순간, 주변에서는 곧바로 ‘저쪽 라인에 섰다’는 해석이 돌아다닌다. 공식적 회의에서의 만남은 기록으로 남지만, 점심은 기록도 없고 사진도 없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누구도 모른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궁금증을 갖게 하고, 더 많은 해석을 낳는다.

저녁에서 점심으로 정치가 이동한 데에는 사실 음주문화의 변화도 영향을 줬다. 과거에는 저녁 술자리에서 잔을 기울이며 속내를 털어놓고 신뢰를 쌓았지만, 지금은 술 한 잔이 자칫 윤리 이슈로 번지고, 사생활 관리의 부담이 크며, 사진 한 장만 잘못 찍혀도 논란이 된다.

그러다 보니 저녁의 정치적 비용이 급증했고, 자연스럽게 정치인들은 가볍지만 깊은 대화가 가능한 시간을 찾게 됐다. 결국 그 자리가 점심이었다. 점심은 부담이 없고, 공적 일정 안에 포함할 수 있으며, 대화의 길이가 길지 않아도 충분히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다.

점심 자리에서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술기운에 흔들리지 않아 말의 결이 정확하고, 표정의 흐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여의도 사람들은 “점심이 저녁보다 진짜”라고 말한다.

이 모든 흐름이 점심이라는 단어의 본래 뜻과 다시 맞닿는다는 점은 흥미롭다. 점심(點心)은 원래 ‘마음을 톡 찍어 넣는 시간’이었다. 바로 그 ‘가볍지만 진심이 드러나는 시간’의 성격이, 정치가 가장 필요로 하는 기능이 돼버린 것이다.

저녁이 무거웠던 시대에는 점심이 가벼웠지만, 저녁이 위험해진 시대에는 오히려 점심이 무거워졌다.


정치가 더 은밀해지고,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압축적으로 신호를 주고받는 시대일수록 점심의 중요성은 커진다. 점심은 정치적 결심이 드러나는 시간, 마음의 방향이 찍히는 순간, 권력의 기울기가 미세하게 이동하는 장면이 형성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여의도의 점심 풍경은 늘 분주하고, 짧고, 밀도도 높다. 밥을 먹는다고 하면서도 진짜 중요한 것은 밥이 아니다. 누구와 테이블을 공유하는지, 어디에 앉았는지, 숟가락을 놓을 때 어떤 표정이었는지, 식사 후 빠져나오는 동선이 서로 엇갈리는지조차 의미가 된다.

점심은 이제 여의도의 숨은 회의실이자, 비공식의 공식 공간이며, 가장 짧지만 가장 결정적인 정치의 무대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왜 점심만 한자일까? 그 답은 명확하다. 점심은 밥이 아니라 마음에 점을 찍어 넣는 시간이고, 오늘날 여의도는 그 마음의 점이 찍히는 순간 권력의 지도가 뒤집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낮으로 내려온 시대, 여의도의 점심은 다시 원래의 자리인 ‘마음을 나누는 시간’으로 돌아왔다. 이제 여의도의 진짜 정치 드라마는 저녁이 아니라 점심 테이블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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