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각)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정부의 한반도 정책 구상이 담긴 ‘END 이니셔티브’를 제시했다.
END 이니셔티브는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비핵화(Denuclearization)’, 즉 ‘END’를 중심으로 한 포괄적인 대화로 한반도에서의 적대와 대결의 시대를 종식(END)하고 세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기 위한 책임과 역할을 다하겠다”는 한반도 평화 구상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세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우선 남북 간 불필요한 군사적 긴장과 적대 행위의 악순환을 끊어내고자 한다”며 “앞으로 우리 정부는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회복의 길을 일관되게 모색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한반도 평화는 남북은 물론 국제사회가 함께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며 “남북 관계 발전을 추구하면서 북미 사이를 비롯한 국제사회와의 관계 정상화 노력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북핵 문제와 관련해 “비핵화는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렵다.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 ‘중단’부터 시작해 ‘축소’의 과정을 거쳐 ‘폐기’에 도달하는 실용적, 단계적 해법에 국제사회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특히 “우리 정부는 북한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 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일체의 적대 행위를 할 뜻이 없음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힌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에 앞서 지난 22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개 국가임을 국법으로 고착시킬 것”이라며 단절을 강조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내놓은 END 이니셔티브는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문을 여는 시도였다. 교류에서 시작해 관계 정상화를 거쳐 비핵화로 가자는 발상은 ‘비핵화 우선론’에서 벗어난 신선한 제안이었다.
남북 대화를 위해 문을 닫지 않고, 작은 신뢰에서 큰 평화로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END 이니셔티브는 패러다임을 바꾸는 유연한 접근으로, 기존의 ‘비핵화 우선’ 기조와 달리 신뢰 구축을 먼저 하자는 발상이어서 유엔 회원국들로부터 박수도 받았다.
특히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주체적 역할을 강화하면서 우리가 평화 구상을 주도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은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책임을 분명히 한 행보로 높이 살만 하다. 남북 간 비군사적 교류의 가능성을 열고 긴장 완화와 신뢰 회복 의지를 공식화했다는 점도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구체성이 결여돼있다는 점이다. 어떤 조건에서 교류를 시작하고, 정상화의 범위와 기준을 어떻게 정하며, 비핵화를 어떻게 검증할지가 제시되지 않았다. 청사진은 제시했지만 설계도가 빠진 셈이다.
더 큰 위험은 비핵화 이전 정상화가 불러올 역효과다. 북한은 핵을 보유한 채 경제적 실익만 챙길 수 있다. 이는 사실상 핵을 용인하는 꼴이 될 수 있으며, 결국 한반도 비핵화의 목표를 더 멀어지게 할 수 있다.
국제 공조와의 정합성도 불확실하다. 미국은 ‘비핵화 전제’를 강조하는데, 우리만 정상화 병행을 내세우면 한미 간 메시지 불일치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동맹 신뢰를 흔들고, 유엔 제재 체제와도 충돌할 소지가 있다.
무엇보다 북한은 이미 “비핵화 전제의 대화 불가”를 못 박았다. 대화와 교류의 첫 단추조차 꿰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언적 구상만 내세운다면 공허하게 끝날 공산이 크다.
국내 정치적 합의도 없는 상태에서 정권교체 때마다 뒤집히는 대북 정책의 불안정성 역시 위험 요소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24일, 이 대통령이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평화 구상인 END 이니셔티브를 발표한 데 대해 “실패한 좌파 대북 정책의 재탕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교류(Exchange)를 통한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와 비핵화(Denuclearization)를 말했지만, 결국은 대북 퍼주기와 북핵 용인이라는 결말로 끝날 것”이라며 이같이 적었다.
이어 “E(Everything) ‘다’ 퍼주고도 N(Nothing)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D(Die) 북핵으로 인한 한반도 ‘파멸’을 불러올 가짜 평화 구상”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같은 당 안철수 의원도 END 이니셔티브가 “비핵화를 마지막으로 둔 것은 사실상 종전선언을 비핵화 이전에 먼저 추진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며 “즉 북한의 핵 폐기가 완료되기 전에 먼저 관계 정상화나 교류를 강조한 게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이 대통령의 END 이니셔티브가 지속 가능한 구상이 되려면 구체적 로드맵, 단계별 검증 체계, 동맹과의 정합성, 초당적 합의가 뒷받침돼야 한다. 희망은 현실 위에 세워질 때 힘을 갖는다. 이제 필요한 것은 비전이 아니라 실행의 설계도다.
필자는 1980년대 동서 냉전 속에서도 ‘핵군축 대화’가 결국 소련 붕괴 이후 현실로 이어졌듯이, 지금 당장은 장벽이 높게 보이는 이 대통령의 END 이니셔티브가 머지않아 남북 평화와 통일을 여는 씨앗이 될 것으로 믿는다.
희망과 장벽이 공존하는 지금, END 이니셔티브는 우리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평화와 통일은 불가능해 보일 때조차, 그 가능성을 믿는 이들의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