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야권 주도로 국회서 통과된 상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이 행사되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라디오 방송에 직접 출연해 사의를 표명한 비화를 언급했다. 이 원장은 대세에 반발하면서 갑자기 튀어나와 존재감을 드러낸 세 번째 전직 검사가 되는 걸까?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하 권한대행)이 지난 1일 상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야권 주도로 지난달 13일 본회의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 추가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 ▲일정 규모 이상의 상장회사의 전자 주주총회 병행 개최 의무화 등 내용으로 구성됐다.
의외의 반발
한 권한대행은 “상법 개정안은 대다수 기업의 경영환경 및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어 고심을 거듭했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의 적극적 경영활동을 저해할 소지가 크다”며 “일반 주주 보호에도 역행할 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 전체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야권의 비난은 예정된 순서였다. 하지만 의외의 인물이 한 권한대행의 거부권 행사 전부터 “거부권 행사는 직을 걸고라도 막겠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사의를 표명했다. 의미심장한 것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 권한대행의 거부권 행사 비판을 이어나갔단 사실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2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김병환 금융위원장에게 사의를 표명했다”는 취지의 비화를 밝혔다. 그러면서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전화로 사의를 만류했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에 따르면, 최 부총리와 이 총재가 이 원장의 사의를 만류한 취지는 “시장 상황이 너무 어려운데, 금융감독원장이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이 원장이 비화를 언론에 직접 밝혔단 것과 스스로 “공개된 자리서 다 얘기할 건 아니다”라고 전제했단 사실이다. 현직 금융감독원장이 야당 주도로 통과된 법안에 우호적인 입장을 제시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의 거부권 행사에 대한 항의 표시로 사의를 거론한 정황을 언론에 직접 공표하는 보기 드문 상황이다.
또 이 원장은 “윤 전 대통령이 계셨더라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상법 개정안 거부권에 ‘사직서’
갑자기 튀어나와 존재감 드러내
이 발언도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지난달 31일 기자들과 만나 “상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요청한다”고 말했다. 국민의힘은 야권이 주도하는 상법 개정안에 대해 계속 반대 의견을 밝히면서, 김상훈 정책위의장 주도로 적용 범위를 줄일 수 있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준비했다.
정부와 국민의힘이 준비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핀셋 규제’ 형식으로 구성돼있다. 개정안엔 ▲주주 보호 원칙 특별 규정 신설 ▲합병 가액 산정 시 기업가치 실질 가치 반영 ▲물적 분할 후 자회사 상장 시 모회사 주주에게 공모 신주 최대 20% 배정 등 내용이 담겨있다.
적용 범위도 상법 개정안보다 대폭 줄였다. 상법 개정안은 100만개가 넘는 전체 주식회사 법인에 적용되지만,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코스피·코스닥 상장법인 2464개에만 적용된다.

이 원장은 인터뷰서 “정부가 준비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에도 범위가 조금 제한됐을 뿐 원칙이 비슷한 내용이 담겨있다”며 “주주 보호 원칙을 이미 추진하고 있는데, 모양이 조금 다른 상법 개정안이 통과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거부권까지 행사하느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원장 발언의 요지는 “정부도 결이 비슷한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으므로, 모양이 다소 다르단 이유로 상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면 모순이 된다”는 것이었다.
야권이 상법 개정안을 강하게 준비하고, 국민의힘이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통해 대기업에 어느 정도는 주주 보호 원칙을 요구하는 개정안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언급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2020년 LG화학의 핵심이었던 전지사업본부를 물적분할해 설립한 회사로서, LG화학의 주가가 급락해 주주들이 큰 손해를 입는 사태가 발생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SK E&S와 합병했고, SK E&S 주주에게 불리한 합병비율이 산정돼 손해를 입었단 논란이 이어졌다.
두산그룹도 지난해 두산에너빌리티서 두산밥캣을 분할한 후 두산로보틱스와 합병하려다가 철회했다. 그 당시에도 제기됐던 논란은 두산밥캣 주주에게 불리하고, 두산로보틱스 주주에게 유리한 합병비율이 산정됐단 것이었다.
지난 2015년 진행됐던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이후 재계서 비슷하게 이어졌던 논란이었다. 이후 야권이 상법 개정안을 통해 적용하려던 규정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추구하고,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한다”는 것이었다.
“경거망동 안 된다” 만류
다음 행보 주목되는 이유?
아울러 이 원장은 더불어민주당에 대해서도 “상법 개정안을 너무 서두르지 말아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남겼다. 이 원장은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오는 5월경 국회 정무위서 통과되면, 어차피 법사위에 두 개정안이 모두 모인다”며 “재계는 자본시장법 개정안도 반대하니, 일방적으로 상법을 통과시키면 자본시장법 개정안조차도 거부할 핑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직접 라디오 방송까지 출연했던 이 원장의 반응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이 원장이 정계에 진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제기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수사 경험 때문일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수사는 윤 전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이었던 시절 진행됐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당시 서울중앙지검 3차장이었고, 이 원장도 서울중앙지검 특수4부장이었다. 특히 이 원장은 기소를 강행한 수사팀 내 강경파로 통했다.
아울러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은 이들이 모두 참여했던 최순실 특검의 삼성 관련 수사로부터 시작됐다. 이들은 삼성바이오로직스 상장 과정을 일컬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승계 작업 중 일부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제1심과 항소심서 연이어 전부 무죄 판결을 했다. 이 원장은 지난 2월 서울고법의 항소심 무죄 선고 이후 “법원을 설득할 만큼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점에 대해 국민께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사법부가 법 문헌 해석만으론 주주가치 보호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하니, 자본시장법 개정 필요성이 더 커졌다”는 주장도 남겼다.
이 원장으로선 검사 시절 성과가 사법부에 의해 부정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가능성이 있다. 또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되는 등 새로운 국면이 열린 현 상황도 예의주시해야 하는 측면도 있다.
제3의 출현?
조기 대선이 진행되기 때문에, 상법·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이 원장이 원하는 대로 처리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또 금융감독원장 직책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물론 분명한 것도 하나 있다. 대세에 반발하면서 갑자기 튀어나와 정치적 입지를 굳힌 전직 검사를 이미 2명이나 봤다는 사실이다. 이 원장의 존재감은 이 원장 스스로 행보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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