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는 책들

2025.03.17 09:14:35 호수 1523호

구채은 / 파지트 / 1만6800원

우리는 늘 현관에 앉아 신발을 신으며 오늘은 좀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나, 되도 않는 상상을 한다. ‘천재지변으로 전 세계의 전기 공급이 중단되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늘서 갑자기 개구리 떼가 떨어져 집 안에만 갇혀 지내는 판타스틱한 상황이 벌어지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몽상이다.



이유는 그 어떤 상황보다 싫은 출근 때문이다. 좀비에게 물려 좀비가 될지언정, 차라리 회사에 안 가도 되는 난리법석의 상황이 말할 수 없이 행복한 불행한 회사원. 결코 이상하거나 괴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니까.

<출근하는 책들>의 구채은 저자는 일터서 내면이 찢기고 자아가 소멸되는 것 같을 때, 다 큰 성인으로서 지켜야 하는 존엄함의 영토가 침범당하는 것 같을 때, 감정을 억누르고 익살꾼을 연기해야 할 때, 누군가의 송곳 같은 말이 뒤통수에 착 달라붙어 꿈에까지 쳐들어올 때, 그럴 때 마다 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하나하나 도장 찍듯 남겼다.

물론 그런 고비의 순간에 책이 저자를 살려줬다거나, 지혜를 줬다는 식의 금방 들통이 날 거짓말은 하지 못한다. 책 속 인물들은 대개 저자보다 더 찌질이에, 못난이에, 심지어 실성한 사람들이 많았다. 정면교사보다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파괴돼가는 인간들투성이가 책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 바보를 어떡하니, 불구덩이 속으로 돌진하네” 하며 혀를 끌끌 차게 하는, 측은지심을 불러오는 인물들이어서, 롤모델로 삼았다간 쫄딱 망하기 십상이다. 그들의 인생을 관망하다가 이제 구원의 힘을 좀 발휘해 볼까 하고 손을 뻗을 때쯤, 지하철은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러곤 이런 울림을 준다.

누군가는 끈질기게 분투해 그 세계의 규정에 맞게 자신을 조각해 나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마지못해 지금 세계에 자족하고, 슬프지만 낙관해야 하는 순간도 올 것이다. 그땐 도리가 없다. 그 어긋남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승복하고, 그 삶 속에서 살아갈 틈새를 찾아야 한다.


그 삐쩍 말라 비틀어진 틈새서 구원의 빛으로 찾아낸 건 ‘책’이었다. 고맙게도 그 거칠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틈새를 비집고 나와 나의 손을 잡아준 활자들은 잿빛의 삶을 햇빛 가득한 삶으로 이끌어줬다.

저자가 상황에 맞춰 소개해주는 책들은 절묘하다. 기묘하고도 비틀어져 남루하기까지 한 주인공들의 인생서 나의 존재를 찾고, 위로하고, 통곡하고, 박장대소를 던진다. 그렇게 웃고, 울고, 떠들며, 분노하고, 한탄하다 보면 오히려 오늘도 오롯이 나를 위한 지하철 자리 한 칸이 온전히 남아 있음에 감사를 건네게 된다.

뜻대로 되지 않는 삶과 생계에 대한 중압감이 허무와 절망으로 누를 때. 그럴 때 종종 꺼내보는 초콜릿 같은 책들. 아직 우리에게는 다 꺼내먹지 못한 수천, 수만종의 씁쓸하고도 달달구리한 초콜릿들이 남아 있으니 우리의 출근길은 그리 절망적이지 않다.

나와 함께 출근하는 그들은 일렬종대로 오늘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과 함께 사유하기 위해 가끔은 지루하고 자주 졸리지만 책을 편다. 그리고 믿어본다. 그 작은 힘이 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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