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운동장에 만들어 놓은 눈사람은 각양각색이었다. 눈뭉치를 3층으로 올린 외계인 같은 꼴도 있었고, 원형이 아니라 삼각형이나 사각형으로 만든 로봇 같은 것도 보였다.
반장의 지시가 없어도 그들은 스스로 창의성을 발휘하여 그 어떤 형상을 건축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주먹코를 붙인 놈, 배꼽이 툭 튀어나온 놈, 심지어 다리를 단 놈도 있었다.
솔가지를 꺾어 와서 머리와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신사 눈사람을 만든 팀도 있었다.
내면 혁명 계기
그것이 눈길을 상당히 끌긴 했지만 옆에 선 요염하고 풍만한 여자 눈사람을 보다 보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디서 그런 발상들이 나왔을까? 억눌려 있던 내부의 소망이나 욕구들이 그런 야릇한 모습으로 표현되었을 수도 있었다.
아예 눈사람을 엎어놓고 등짝에 탱자나무 가시를 촘촘히 박아둔 고슴도치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런 부정적이거나 퇴영적인 기색이 보이는 눈사람은 삽을 치켜든 ‘처리조’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
“집합!”
그 소리에 의해 모든 원생들은 동작을 중지하고 운동장에 도열했다. 단상에 오른 원장이 말했다.
“여러분! 대단히 수고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자신이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입니다. 자, 이제 바야흐로 새날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군요. 저 태양은 아침부터 밤이 오기까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위대한 일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태양이 잠시도 쉬지 않고 실천의 행군을 하는 동안 세상의 어둠은 물러가고 모든 존재가 따뜻한 빛을 받습니다.”
“그러면 저 싸늘하고 무정할 뿐만 아니라 위선적인 눈의 장막도 저절로 녹아 버리고 우리는 다시 세상의 진면목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우리 혁명의 정신이며 회피할 수 없는 사명인 것입니다. 여러분 또한 저 찬란한 아침 태양을 본받아 어둡고 게으른 여러분 자신의 내면을 혁명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원장은 자신의 연설에 스스로 도취되어 입에서 침이 튀어나오는 것도 몰랐고 원생들이 시린 발을 구르며 불평하는 것도 몰랐다.
양말이라고 싸구려 나일론으로 만든 ‘낙하산 양말’을 겨우 신긴 했지만, 엄동설한 속에서 작업하다 보면 모르는 새 동상에 걸려 푸르딩딩한 발에서 진물을 흘렸다.
갱생이니 새 삶이니 떠들어대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서글픈 거지 시절이나 막돼먹은 고아원보다도 못한 지옥 같았다. 용운은 원장의 입바른 소리가 듣기 싫어 눈을 슬며시 감곤 옛 생각에 잠겨 들었다.
문득 바다의 배 위에서 피에로가 읊조렸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만일 주위 사람들이 모두 제정신을 잃고
네 탓이라 비난해도 여전히 냉정할 수 있다면
생각하되 생각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승리를 만나도 불행을 만나도 똑같이 의연할 수 있다면
무지한 자들이 왜곡해도 참아낼 수 있다면
본래의 네 자신을 잃지 않는다면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이고 채울 수 있다면….”
원장의 입바른 소리
여러 가지 파노라마
용운은 우울한 표정이었다. 그는 마치 노인처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슬픈 표정을 짓다가 이빨을 악다물기도 했다. 여러 가지 파노라마가 뇌리 속을 맴도는 듯했다.
어느 날 밤 이후로 용운은 갈월동의 그 굴집에 가지 않았다. 그곳의 현실이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다시 거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쓰레기통도 봄에는 별 게 없었으나 여름과 가을엔 제법 뒤질 만했다. 과일 껍질도 있었고, 먹다 버린 닭뼈다귀나 생선뼈도 나왔다. 청과물 시장은 더없이 풍요로운 장소였다.
한쪽이 썩어 팔 수 없게 된 과일들이 질퍽거리는 땅 위에 굴러다녔다. 용운은 그것을 남이 안 보는 곳까지 툭툭 차고 가서는 옷에 슥슥 문질러 목이 메도록 씹어 삼켰다.
어떤 때는 과일을 한 입 삼키는 순간에 불현듯 엄마의 얼굴이 떠오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목에 무엇이 턱 걸리면서 울컥 설움이 복받쳐 오르곤 했다.
엄마, 꼭 찾아갈게.
용운은 인천으로 방향을 정하고 무작정 걸었었다. 고향을 떠나올 때 엄마가 입에 올렸던 지명이 인천이었다.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어서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보니 영등포였다.
가다가 배가 고프면 찹쌀떡이나 군고구마를 파는 아이들에게 웃옷을 벗어주고 바꿔 먹었다. 추위에 떨 일이 걱정이긴 했으나 당장의 배고픔이 먼저였다.
어느 날 밤, 잠자리를 찾기 위해 헤매다 보니 커다란 쓰레기장이 눈에 띄었다. 누가 불을 놓았는지 쓰레기더미 위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용운은 다가가서 막대기로 헤집어 보았다. 시뻘건 불씨가 마른 종이쪽에 옮겨붙으며 불꽃이 되살아났다.
박스 하나를 주워다 깔고 불 옆에 막 누우려는 때였다.
“야, 너 이리 와 봐.”
슬쩍 보니 웬 순경 하나가 자전거에 걸터앉아 손짓을 하고 있었다. 용운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무슨 잘못한 게 있었던가?
그 짧은 순간 그동안 행했던 온갖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스쳐갔다.
“이리 오라니까 뭘 멍청하게 쳐다봐, 임마!”
영문도 모른 채 다가가니 순경이 한 마디 뱉었다.
“빨리 따라와.”
경찰서에 도착하자 난롯가에 모여 있던 순경들 중 하나가 물었다.
잡혀온 기억
“어디서 잡아왔어?”
“쓰레기장에서 자려는 걸.”
“주무시려던 차에 안됐군. 야, 부모가 있어 없어?”
부모가 있다면야 누가 이 꼴로 다닐까마는 순경은 웃으며 건성으로 묻는 것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