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빨리 가서 들것 가져와!”
왕거미 사장이 이르고는 용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이 자식, 이 기회에 똑똑히 봐 둬! 도망자의 꼴이 어떤가를…….”
그러나 용운의 귀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만 아뜩해지는 의식으로 팔딱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만 들을 따름이었다.
제왕 원장
시신은 공동묘지로 운반되고 원장의 명령하에 매장을 했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해변에서 파도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외로운 주검에게 들려주는 장송곡과도 같았다.
용운은 묘지 위로 눈물을 뿌리며 진심으로 그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하늘나라에 가거든 다시는 부모랑 헤어지지 마세요. 다시 태어나더라도 부랑아나 거지는 되지 말구요.”
그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저 무덤 속에 누운 사람은 이 땅 선감도에서는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곤 시간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운 곳을 향해 스스로 떠났는지도 몰랐다.
그 사람은 원래부터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동작이 좀 굼떴는데, 언젠가 원장이 시킨 일을 성격대로 느릿느릿 하다가 원장의 몽둥이에 머리를 얻어맞은 뒤부터 그렇게 변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일반 사회로부터 외떨어져 깊은 바다의 섬에 건립된 선감원은 하나의 특별한 왕국이었다.
원장은 그곳의 제왕과 같았다. 그는 군사정권의 의지(意志)를 선감학원에서 실현해 보려고 광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부 숙사의 명칭을 군사정권의 이상(理想)이 반영된 ‘개척사’나 ‘창조사’ 등으로 바꾸어 독려하기도 했다.
그게 그닥 큰 효과가 없자 나중에는 ‘비둘기사’ ‘종달새사’ ‘앵무새사’ 따위로 교체해서 원생들이 고분고분하게 교화되기를 희망했다.
모든 것이 군대식으로 상명하달되었고 그것을 거부하면 고통과 죽음이 따를 뿐이었다. 탈출이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 등의 경우엔 그나마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선생들의 폭행으로 인한 죽음이나 자살일 경우에는 허름한 가마니에 둘둘 말아 산골짝 으슥한 곳에 던져 버리는 것이 예사였다.
그렇게 죽어 나가는 원생들의 수가 많을 때는 하루에 네댓 명이나 될 때도 있었다.
선감학원 측에서 쓰레기라고 비하하는 원생들의 탈출을 기를 쓰고 막는 것은 원생들이 쓰레기이기도 하면서 재산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정부 지원금을 받아 착복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염전이나 양잠 등등 원생들의 피땀 어린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수익금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수천 가마의 소금이 군대에 납품되었다.
수많은 원생들이 배를 곯으며 일한 대가인 그 돈으로 원장은 서울에다 으리으리한 저택과 빌딩을 구입해 두었다는 얘기도 어디선가 새어나왔다.
또한 원장은 가까운 장래에 정치계로 진출하기 위하여 권력 고위층에다 막대한 자금을 대고 있다는 풍문도 떠돌았다.
선감도에는 뱀이 많았다. 원생들은 틈이 나면 막대기를 들고 뱀을 잡으러 다녔다. 독이 잔뜩 오른 가을 뱀에 물려 시퍼렇게 부은 얼굴로 죽은 아이들도 있었다.
뱀을 잡는 건 사장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그렇게 잡힌 통통한 뱀들은 원장에게 상납되었다.
원장은 몸 보신을 위해서인지 아무튼 뱀을 즐겨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원장 사택에서는 뱀탕을 끓이는 연기가 늘 몽실몽실 솟아오른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산기슭에서 왕거미 사장이 직접 뱀 대가리를 잡아 들고 목을 따서는 껍질을 쫙 벗겨 내리는 모습을 용운은 본 적이 있었다. 뱀은 핏물이 도는 허연 알몸뚱이로 꿈틀거렸다.
군사정권의 의지 실현
재산 가치 있는 원생들
사장은 손목을 감는 뱀의 꼬리를 훑어내리곤 뱃속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창자 속에 든 노란 팥알 같은 게 줄줄이 달려 나왔다.
사장은 입술에 뱀 피를 묻힌 채 그것을 하나하나 신속히 따 먹었다. 그리고 뱀 몸뚱이는 불에 구워 걸신 들린 듯 씹어 삼키는 것이었다.
용운은 지난번에 그에게 당한 추악한 기억이 떠올라서 구역질을 했다. 그는 그 후로는 용운의 거센 반항에 질린 듯 손을 뻗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어린 소년들이 그의 추악한 욕망의 제물이 되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때 용운의 눈 앞으로 꽃뱀 한 마리가 스르르 지나갔다.
용운은 엉겁결에 대나무 막대기로 뱀의 허리를 내리쳤다. 별로 잡을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도 내리친 것은 관성적인 동작이라고도 할 수 있었고, 용운의 마음속 깊이 또아리 친 증오심과 살해욕에 의한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뱀은 괴로운지 하늘을 쳐다보며 꿈틀거렸다. 용운은 갑자기 불쌍한 느낌이 들어 막대기를 더 내리칠 수가 없었다. 그 틈에 뱀은 수풀 속으로 숨어 들어가 버렸다.
“죽여! 어서 죽이라구, 멍충이 새끼야!”
사장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새끼 넌 이제 일났어! 그렇게 때려놓고 완전히 죽여 버리지 않으면 밤중에 찾아와서 꼭 해꼬지를 한단 말이야. 흐흐흐…….”
그 능글맞은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용운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마치 자신의 허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왠지 뜨끔뜨끔했다. 밤엔 눈에 벌건 불을 켠 뱀떼에 쫓기는 꿈을 꾸며 가위눌림을 당했다.
가을에 있었던 또 하나의 사건은 백곰 반장과 절름발이 누나의 연애에 관한 일이었다. 용운은 그동안 틈틈이 쪽지를 전달해 주곤 했었지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 누나는 하얀 얼굴로 함초름하게 웃을 뿐 깊은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양잠반으로 차출되어 가 있던 피에로가 마치 채플린처럼 눈의 흰자위를 드러내고 얄궂게 웃으며 얘기를 전했다.
가위눌림
“요즘 가을누에가 뽕잎을 아주 많이 먹거든. 그래서 애들 몇이 저녁에 뽕밭으로 갔던 거야. 맨 앞에 가던 방개 놈만 봤다는데 말야, 으슥한 뽕잎 속에서 두 청춘 남녀가 달콤하게 밀어를 속삭이고 손을 잡더니 입맞춤을 하더라는 거야. 그런 후에 허연 젖가슴을 봤다나, 허벅지를 봤다나…… 아무튼 인기척을 느꼈는지 뒷산 쪽으로 줄행랑을 놓더래.”
“그 방개란 애가 분명 허풍을 친 걸거야. 그 누나가 몸도 약한데 밤중에 거긴 뭐하러 갔겠어, 안 그래?”
“난 모르지 뭘. 아무튼 하얀 옷자락이 펄럭이는 걸 봤다니까. 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어?”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