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자신의 언행에 대해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 봄’.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반성’의 의미다. 교정시설은 범죄자를 교정하고 교화해 사회인으로 복귀시키려는 취지로 운영된다. 교정·교화의 전제 조건은 자신의 죄를 비롯해 피해자를 향한 진지한 반성이다.
‘범행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했다’. 판결문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다. 반대로 ‘반성하는 모습이 없었다’는 문구도 자주 등장한다. 반성 여부가 피고인의 형량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다.
대필도 성행
양형위원회에 따르면 양형 기준의 개별 범죄군에서는 ‘진지한 반성’을 일반 감경인자로 두고 있다. 형벌은 응보뿐만 아니라 예방에 목적이 있다는 게 이유다. 또 영국이나 독일, 일본 등에서도 ‘진지한 반성’ ‘반성, 성찰, 자백’ 또는 ‘진심 어린 사죄’를 감경사유로 고려하고 있다.
양형위원회는 범행을 인정한 구체적 경위, 피해 해소 또는 재범 방지를 위한 자발적 노력 여부 등을 조사·판단한 결과 피고인이 자신의 병행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를 ‘진지한 반성’으로 정의했다. ‘진지한 반성’의 입증자료로 쓰이는 반성문을 제출한다고 해서 바로 감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판사는 범죄 양형 기준에 따라 감경 요소, 가중 요소를 판단해 최종적으로 피고인의 형량을 결정한다. 문제는 반성이라는 주관적인 요소를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점이다. 사건 관련 보도를 유심히 보다 보면 피고인이 ‘주기적으로 반성문을 내고 있다’ ‘수백장의 반성문을 제출했다’ 등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정유정이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유정은 과외 앱으로 알게 된 또래 20대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유기한 혐의(살인 등)로 기소된 상태다. 정유정 사건의 재판부는 다른 사건서 정유정의 반성문 제출에 관해 언급했다.
부산지법 형사6부 재판장인 김태업 부장판사는 한 사건의 결심공판에 출석한 피고인의 잦은 반성문 제출에 관해 “정유정도 계속해서 반성문을 써내고 있지만 그게 반성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본인이 생각하는 걸 표현하는 것까지 좋다”면서도 “반성문은 본인의 처한 상황을 되돌아보고 뭐가 잘못됐는지, 본인의 심정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앞으로 어떻게 생활하겠다는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에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정유정은 지난 7월부터 최근까지 3개월간 13번에 걸쳐 반성문을 냈다. 반성문을 쓸 때마다 판사가 내용을 제대로 볼지 의구심을 품었다고 한다. 김 부장판사는 “반성문을 제출하면 판사가 구체적으로 다 읽어본다”면서 “본인이 써낼 게 있다면 어떤 것이든지 써내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범죄자의 반성문에 대한 국민 여론은 부정적이다. 특히 피해자의 용서를 구하지 못한 피고인이 반성문 제출로 감형을 노리는 모습을 보일 때 공분이 일기도 한다. 부산 서면서 귀가하던 20대 여성을 무차별로 폭행한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고인이 제출한 반성문이 대표적인 경우다.
지난 6월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는 SNS에 피고인이 제출한 반성문 일부를 공개했다. 피고인은 “저의 착각과 오해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묻지마식 상해를 가한 것에 대해 깊이 잘못을 느끼고 있다”면서도 “상해서 중상해 살인미수까지 된 이유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저와 비슷한 묻지마 범죄의 ‘죄명’ ‘형량’도 제각각인데 왜 저는 이리 많은 징역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전과가 많다는 이유라면 저는 그에 맞게 형집행을 다 했다”며 억울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피고인은 전과 18범이다. 지난달 대법원서 징역 20년형이 확정된 바 있다.
양형 기준 ‘진지한 반성’
100장 넘게 써도 원심 확정
피해자는 “피고인이 이제는 좀 바뀌었을까 싶어서”라며 반성문을 꾸준히 확인하는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그런데 이러한 내용의 반성문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며 “반성문이 감형의 사유가 되나, 언제쯤 이 가해는 끝이 날까? 저는 언제까지 고통받아야 하나”라고 덧붙였다.
반성문이 감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필 서비스’도 성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말 그대로 재판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반성문을 ‘만들기’ 위해 대신 써주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성범죄와 관련해 ‘감형 패키지’를 내건 로펌이 성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검찰청은 피고인이 반복적으로 반성문을 제출한다고 해서 곧 ‘진지한 반성’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못 박았다. 지난 3월 대검 공판송무부는 성범죄 사건 판결문 91건을 분석한 결과를 내놨다. 이 중 피고인의 반성이 감형 사유로 들어간 판결은 27건으로 파악됐다.
이는 ▲성범죄자가 범행을 자백하면서 피해자와 합의한 경우 ▲피해자의 피해 해소를 위해 노력한 경우 ▲초범인 경우 등이 감형 사유로 들어갔다. 대검은 “단순한 기부 자료나 교육 이수증, 반복적 반성문 제출만으로는 인정되기 어렵다”고 했다.
실제 ‘N번방’ 사건의 주범인 조주빈은 반성문을 100장 넘게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을 협박해 성착취물을 촬영한 뒤 텔레그램 등을 통해 판매·배포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조주빈은 정식 재판이 시작된 뒤에는 ‘1일 1반성문’ 수준으로 썼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부에는 큰 영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2021년 음란물 제작 배포 및 범죄단체조직 등 혐의로 기소된 조주빈에게 징역 4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N번방 사건과 관련해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보복 협박) 등으로 기소된 강모씨의 경우 재판부로부터 반성문 관련 지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재판부는 “이런 반성문은 안 내시는 게 낫겠다”며 “‘저만 고통받으면 그만이지만 범죄와 무관한 가족과 지인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는 어떤 말인지 알겠지만 반성하는 태도를 저희한테 알려주실 거면 좀 더 생각하고 쓰는 게 본인한테도 좋다”고 꾸짖었다.
속 타는 유족
피해자나 유가족은 피고인의 엄벌을 탄원하면서도 반성문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 혹은 유가족의 피해 해소를 위해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감형을 노리는 수단으로 반성문을 제출하는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반성은 사라지고 반성문만 남은 시대가 됐다는 한탄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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