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대통령의 뒷모습 ㊳애국자 혹은 배덕자

  • 김영권 작가
2023.06.28 09:39:05 호수 1433호

김영권의 <대통령의 뒷모습>은 실화 기반의 시사 에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을 다뤘다. 서울 해방촌 무지개 하숙집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작가는 무명작가·사이비 교주·모창가수·탈북민 등 우리 사회 낯선 일원의 입을 통해 과거 정권을 비판하고, 그 안에 현 정권의 모습까지 투영한다.



문이 열리자 먼저 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창백한 낯빛에 안경 너머 눈동자는 잔뜩 충혈돼 냉정한 기운을 내쏘았다. 올림머리가 퍽 단정해보였으나 결이 푸석푸석해서 그런지 미감[美感]은 그닥 느껴지지 않았다.

공적과 과오

“오, 윤 여솨님! 간만에 뵈니 엄청스리 반갑슴둥!”

피에로 씨가 북한 말투를 흉내 내며 너스레를 떨었으나 여자는 대꾸 없이 나를 쓱 훑어보았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문을 닫곤 딸깍 잠갔다.

정면 벽 위쪽에 박 대통령 부녀의 대형 사진이 걸렸고 그 사이에 태극기가 붙어 있었다. 바로 아래쪽과 사면 벽엔 여기저기 각종 구호가 울긋불긋 내걸려 정신을 어지럽혔다.


“위대하신 인신님과 여왕님의 초능력으로 북진통일하여 동족을 구해낸다!”

“자유대한 만세! 북괴 세습 공산당 타도!”

“천국의 맛은 지옥을 겪어 본 사람들이 잘 안다.”

“대한민국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모두 아오지 탄광 수용소로 보내자!”

“꿈을 꾸라. 그러면 바로 이곳이 천국으로 변하리라!”

퀴퀴한 곰팡이 냄새 비슷한 게 풍기는 실내에 어울리지 않게 신품 탁자 위엔 컴퓨터가 서너 대 놓였고, 그 앞에서 젊은 남녀들이 인형처럼 앉아 무슨 일엔가 몰두해 있었다.

“윤 여사님, 점점 더 예뻐지시는군요. 정말 매력적이십니다. 그건 그렇고, 여기 인기 작가이자 우리 한민족 통일과 웅비에 관심이 많은 저의 아우님을 소개합니다. 우리 사업에도 앞으로 큰 도움을 주리라고 예상합니다!”

피에로 씨가 너스레를 떨며 나를 가리켰다. 원래 허풍이 심한 편이긴 했지만 좀 지나치다 싶었다. 꿈은 크되 나는 아직 인기 작가가 아니며 통일 문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고 그의 아우가 되긴 싫었으며 나아가 그들의 사업에 도움이 될 생각도 없었다. 그냥 구경 삼아 한번 따라온 것뿐이었다. 그렇긴 해도 만일 그들에게 한 가닥 진실이 있거나 혹 오해받는 부분이 있다면 내심 밝혀 보고 싶었다.

“반갑습네다. 저리 좀 앉으시라우요. 커피 한잔 내오겠어요.”

북한 말투와 서울 억양이 섞인 언어였다. 피에로 씨가 다른 책상 쪽으로 가서 중년 남자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소파에 앉아 실내의 분위기를 파악해 보려 애썼다.


‘음, 저 태극기는 어쩐지 좀 숨이 막힐 것만 같군. 왠지 부녀가 양편에서 함께 꽉 조이는 것 같아. 박 대통령은 과연 인신 같은 애국자일까, 혹은 배덕자일까? 잘못했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다 잘했다는 허풍 또한 거짓이야. 왜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잘한 것과 잘못한 점을 확실히 구분하지 못한 채 국민들이 편을 나눠 반목하며 여전히 아웅다웅하고 있을까?”

“이젠 그이의 공적과 과오를 구분해서 정리하고 미래의 거울로 삼아야 할 텐데…. 그래야만 그이도 삼도천의 중음신 신세를 벗어나 저승에서 나름 편안히 쉬련만…. 놓아 주질 않으니 허공을 떠돌며 얼마나 괴로울지 몰라. 멍텅구리들아, 이젠 제발 좀 놔 드려라!’

죽은 지 수십년 장단점 구분 못하고 편 가르기
공적·과오 구분해 정리하고 미래 거울 삼아야

그 순간 윤 여사가 커피를 들고 와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살짝 앉았다.

“만나 뵈어 반갑습네다. 대머리 아저씨 얘기론 훌륭한 작가시라던데… 아무쪼록 저희 사업에 많은 도움 주시길 바랍네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눈꼬리에 주름이 많이 잡히면서 작은 입술에도 웃음기가 살짝 감돌았으나, 눈동자 속의 냉기 때문인지 어쩐지 가면 같은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나는 일부러 하품을 조금 하는 척 입을 벌리다가 말했다.

“어이쿠, 허풍에 속아 넘어가시면 안 돼요. 저는 아직 초라한 무명 작가일 뿐입니다. 그리고 무슨 얘길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정치적인 사안에다 제 글을 이용하는 건 가능하면 사양하고 싶습니다.”

“네, 그래요. 우리도 그러려고 합네다. 하지만 모든 건 정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도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걸요.”

“하하, 그렇죠. 산속이나 외딴 섬에 살지라도 정치의 거미줄을 벗어나긴 어렵죠. 다만 저는 이용당하거나 이용하지 않으려 나름 조심할 뿐이에요. 밀착하는 순간 걸려들어 거짓말쟁이 거미의 밥이 될 뿐이니까요. 하하….”


“그래도 모두 각자 가진 재주껏 대통령님 각하와 나라의 큰 은혜에 보답해야죠. 그게 동물 아닌 인간의 윤리 도덕입네다.”

“글쎄요. 어딘지 조선인민공화국에서 권장하는 윤리 도덕 냄새가 나는 것 같네요.”

“어머, 그건 북조선에서만은 절대 안 돼요!”

“왜요? 피장파장 같은데….”

난 슬쩍 떠보았다. 그러자 북쪽에서 탈출해 내려온 여자는 냉엄한 눈초리로 흘겨보며 새된 소리를 냈다.

“독재자 무리의 사이비 왕국이니까요! 우리가 해야 할 위대한 사명은 바로 그 세습 독재 광인들을 몰아낸 뒤 그 더럽혀진 금수강산을 청소하고 곳곳에 자유대한의 태극기를 휘날리게끔 하는 겁네다!”

“그래도 좀 이성적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광인에게 광적으로 대한다면 과연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떠봤는데...

“흥, 효과는 이미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구요. 양질 전화의 법칙을 모르세요? 좋든 나쁘든 양적으로 총공세를 펼치다가 보면 언젠가 별안간 질적으로 대변화가 일어나 사상누각처럼 무너지게 돼 있다구요. 그러니 여하튼 힘 모아 열심히 해보시자요. 자, 제가 급무를 처리하는 동안 이거나 좀 보고 계시라요.”

윤 여사는 탁자 위에 쌓아 놓은 팸플릿 더미에서 한 부를 집어 건네더니 급히 저쪽으로 가 버렸다.

나는 심심풀이 삼아 슬슬 훑어보았다. 저품질 모조지 위에 울긋불긋하고 검은 활자들이 무슨 괴상스런 벌레들처럼 기어 다니며 선동적인 독기와 분비물을 내뿜는 성싶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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