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박 일 기자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 및 영정사진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이날 서울 여의도 국회서 열린 최고위원회서 이태원 참사 합동분향소에 희생자들의 이름이 없는 점을 거론하면서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의 이름도, 영정(사진)도 없는 곳에 국화꽃 분향만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세상에 어떤 참사에서 이름도 얼굴도 없는 곳에 온 국민이 분향하고 애도하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유족들이 반대하지 않는 한, 이름과 영정을 당연히 공개하고 진지한 애도가 있어야 된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촛불을 들고 다시 해야겠느냐”고도 했다.
이 같은 주장은 전날(8일), 같은 당 최민희 전 의원의 명단 공개 요구에 힘을 싣는 발언으로 읽힌다.
최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 “희생자 명단, 영정, 위패 없는 합동 조문소에 대통령은 6번 방문한다. 행안부 장관, 서울시장, 용산구청장, 경찰청장 단 한 명도 ‘내 책임이다, 사퇴하겠다’는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유가족 인터뷰도 거의 없다. 슬픔에 장막을 쳐놓고 애도하라고 한다”면서 “희생자 이름과 나이를 알고 영정 앞에서 진짜 조문, 애도하고 싶다. 유가족께 기성세대 한 명으로 사과하고 위로 드리고 싶다”고도 했다.
이날 희생자 명단 공개 주장에 대해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유가족 슬픔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패륜 행위”라며 비판 목소리를 냈다.
주 원내대표는 “이전의 광우병, 세월호에 있어서의 행태를 그대로 재연해 정치적 이득을 노리려는 것으로, 국가적 애도 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국민적 비극을 정치공세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당 장제원 의원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유가족들과 국민을 더 고통스럽게 하더라도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것 아니냐”고 비꽜다.
장 의원은 “이 문자는 직설적으로 ‘이태원 참사를 정략에 이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충격을 넘어 참담함을 느낀다”며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라는 문장에선 소름이 끼쳤다. 참 잔인들하다”고 비난했다.
이어 “진정, 책임자 처벌보다 희생자 얼굴과 프로필을 공개하는 것이 더 시급한가. 이 분들과 함께 정치를 하고 있는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괴감마저 든다”고 말했다.
사실 희생자 명단 공개는 지난 7일, 같은 당 문진석 의원의 휴대전화 속의 ‘희생자 명단 확보’ 메시지가 도화선이 됐다.
이 메시지엔 ‘참사 희생자 전체 명단과 사진이 공개되는 것은 기본’ ‘유가족과 접촉을 하든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전체 희생자 명단, 사진, 프로필을 확보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논란이 일자 문 의원은 “개인 간 텔레그램이며 제게 보내온 메시지를 읽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주장하고 있는 희생자 명단 공개는 가능할까?
이에 대해 정부는 명단 공개는 검토한 적 없으며 이동통신사가 제공하는 실시간 밀집도 확인 시스템을 열람할 권한도 없다고 밝혔다.
이날 김성호 중앙재난대책안전본부 총괄조정관 겸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은 “중대본 차원에서 이(희생자 명단 공개) 부분에 대해 검토하거나 논의한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임인택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도 “입원 치료 중인 18명 중 중환자는 14명으로 이들의 상태에 대해선 개인정보라 알려드릴 수 없고 저희가 갖고 있지도 않다”고 말했다.
임 실장은 “이동통신사 이동량을 사전에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며 “방역 차원에서 전체적인 이동량이 어느 정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질병관리청을 통해 정보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야권의 희생자 명단 공개 요구와 관련해 국가인권위원회는 ‘기본 출발은 사생활’이라는 입장이다. 유족들 동의가 우선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송두환 인권위원장은 이날, 서울 여의도 국회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동의하는 유족들을 전제로 명단을 공개하고 추모하도록 하는 게 인권적 측면에도 부합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송 위원장은 “(이번 사태가) 공적인 사안으로 돼있기도 해서 일정 부분은 공공적인 알권리의 영역에 속하는 부분도 있다”면서도 “다만 이것의 기본적인 출발은 사생활이다.(그럼에도)유족 동의 여부에 따라 조정돼야 할 내용이라 당국에서도 염두에 두고 뭔가 준비하고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세월호 참사, 대구지하철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규모 참사 때 정부는 물론 언론을 통해서도 사망자 명단이 발표됐었다. 다만 이번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은 앞선 참사와는 다소 성격이 다른 점, 유족들이 공개를 꺼리는 점 등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앞서 2018년 7월, 법원은 5·18 유공자 명단 공개 청구소송에서 “공개 대상이 아니다”라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던 바 있다. 비공개로 보호되는 사생활 비밀 등의 이익이 공개로 인한 공익보다 크다고 본 것이다.
현재 대규모 참사에 대한 희생자들의 명단 공개 기준이 마련돼있지 않은 탓에 정치권에서 ‘명단 공개’를 두고 괜한 정쟁을 벌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