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집착’인가 ‘집념’인가. 정치인들은 선거철마다 유권자들에게 전화를 건다. 고작 ‘몇 번’이라던 연락은 후보 수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특히 뽑을 사람이 많은 지방선거가 돌아오면 유권자들의 피로감은 극심해진다. 애써 무시해도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놈 목소리’. 이들은 승리를 위해 편법과 불법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인다.
날마다 빗발치는 선거 전화. 이에 대한 불편과 짜증은 오롯이 유권자들의 몫이다. 선거 때마다 ‘뿔난’ 유권자들의 항의가 줄을 잇는다. 지난 21대 총선 당시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에 접수된 선거 관련 상담은 무려 1만507건. 신고 건수도 156건에 달했고, 이에 따라 105건의 행정처분이 이어졌다.
막무가내
유권자들은 “지방선거가 가장 피곤하다”고 입을 모은다. 걸린 ‘자리’가 많다 보니 자신을 알리겠다는 사람도 자연히 많아지는 탓이다. 지방선거에서는 광역자치단체장과 지방자치단체장, 의원, 교육감 등을 동시에 선출한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목전에 둔 지금도 피로감을 호소하는 유권자가 늘고 있다, A씨 역시 그중 한 명이다.
그는 경기도 B시의 유권자다. 그는 지난달 중순부터 B시의 각종 경선 후보자가 보내는 연락에 계속 시달려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일면식도 없는 정치인들의 전화와 문자가 날아들었다.
A씨는 “지난 대선 때 많은 사람이 피로감을 호소했던 일명 ‘허경영 전화’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며 “단 며칠 만에 20통에 가까운 선거 홍보 전화를 받았다.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전화 공세에 시달리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에게 선거 전화란 어디서 어떻게 연락한 건지도 모르는, 그리고 어떻게 피해야 할지도 모르는 ‘스토커’ 같은 존재였다.
A씨는 “내가 알려준 적도 없고, 정보 제공에 동의한 적도 없는데 선거 사무실에서 내 번호를 어떻게 수집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연락이 불법은 아닌 만큼, 취득 경로도 합법적일 거라는 막연한 믿음은 있다”면서도 “하지만 애시당초 개인의 동의 없는 개인정보 수집이 용인된다는 것 자체가 몰상식한 상황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뽑을 사람 많은 지방선거 극성
“제발 그만” 유권자 피로감 호소
그는 “연락을 막을 방법이 사실상 없다”고 지적했다. 유권자로서는 연락이 올 때마다 그 번호를 수신 거부·차단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대응책인데, 번호를 계속 바꾸며 오는 연락에는 손쓸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직접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선거 홍보에는 대부분 발신전용 전화나 ARS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A씨는 “개인적으로 어떤 내용이든 전화 오는 것 자체에서 부담을 많이 느끼는 편”이라며 “그래서 그런지 이 상황이 더욱 답답하고 스트레스로 다가온다”고 하소연했다.
이와 관련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중선관위)는 ‘업무 소관을 벗어난 일’이라며 직접적인 답변을 피했다. 중선관위 관계자는 “개인정보 수집 절차나 방법에 대해 선거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된 것은 없다”며 “단지 ‘문자메시지를 이용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 등의 원론적인 규정만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공직선거법은 연락 방법과 횟수 이외에 별다른 제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공직선거법에 의하면 ARS 등 자동응답전화는 발신 횟수 제한이 없다. 다만 전화를 통한 지지 호소는 불가능하고, 투표 독려를 통한 우회적인 홍보만 가능하다. 보다 적극적인 홍보수단인 선거문자는 유권자당 최대 8번씩 발송할 수 있다.
다만 예비후보자가 20명 이하의 유권자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로 일일이 문자를 보내는 것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편법’을 조금만 활용하면 유권자에게 연락을 무한정 보낼 수 있는 셈이다.
중선관위 측은 “규정의 부재로 우리(중선관위)가 별도 규제는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대신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유관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일요시사>는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이하 개인정보위)에 관련 내용을 문의했다. 개인정보위에서 개인정보 수집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구멍 뚫린 규정에 각종 편법 판쳐
개인정보위 “엄정 처분 내려 관리”
개인정보위 설명에 따르면 선거 문자 등을 발송할 목적으로 제3자에게 개인정보를 제공받는 경우에도 관련 법에 의해 반드시 유권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선거사무소가 유권자 개인정보를 수집할 때는 ‘방법의 적법성’과 ‘당사자의 동의’라는 두 조건을 무조건 겸비해야 한다는 것.
만약 유권자가 개인정보 처리 정지를 요구한다면 이에도 바로 따라야 한다. 또 선거사무소는 유권자가 자신의 개인정보 수집 출처를 밝히라고 요구할 때, 즉시 그 출처와 처리 목적을 밝혀야 한다.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특히 수집 출처는 구체적으로 알려야 한다. “불특정 제3자로부터 수집했다”거나 “방법을 알 수 없다”는 등 불명확한 답변은 위법이다. “오기입으로 연락이 잘못 갔다”는 등의 해명도 옳은 응대로 인정받기 어렵다.
다만 개인정보위도 ‘편법’ 연락에 대한 해결책은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중선관위 관계자 역시 “입법부가 주도하는 선거법 개정 이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고 털어놨다. 입법부의 관심과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
문제는 국회의원의 선거운동도 선거법 개정의 영향권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국회의원들이 이 같은 규제 ‘셀프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편 개인정보위 측은 국민 우려가 큰 점을 들어 선거 관련 개인정보 침해사례에 대한 엄정 대응을 예고했다. 특히 2020년 8월 출범 이후 처음 치러지는 지방선거인 만큼, ‘일벌백계’할 선례를 남기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윤종인 개인정보위 위원장은 지난달 27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지방선거 대비 개인정보 관련 준수사항’을 의결한 뒤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국민 관심과 인식이 높아진 상황에서 선거운동기간 중 불법적 개인정보 활용에 대한 국민불편 등 개인정보 유·노출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반쪽 대응
이어 “개인정보위는 선거 입후보자들이 개인정보 보호 관련 법규를 준수함으로써, 선거운동 과정에서 유권자들의 개인정보가 보호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기사 속 기사> 선거용 개인정보 수집 어디까지?
선거 과정에서 활용하기 위해 유권자 개인정보를 수집하려면 개인정보 보호법 제15조에 따라 정보주체의 동의를 받는 등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유권자의 동의를 받았다고 해서 그의 모든 개인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거용 개인정보 수집 범위는 관련법 제16조에 따라 최소한으로 제한된다.
선거를 위해 수집할 수 있는 개인정보는 성명·생년월일·주소·전화번호·이메일 주소뿐이다.
이 역시 선거가 끝난 후에는 지체 없이 파기해야 한다.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