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출판 시장에서 중요한 업무를 하는데도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대필 작가다. 베스트셀러 절반 이상은 대필 작가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작물에는 제작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다. 영화 엔딩 크레딧에 스태프 이름이 적힌 자막이 올라오는 것처럼 말이다. 스태프는 창작물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고 사명감을 가진다. 하지만 영화와는 달리 책에는 대필 작가의 이름이 판권에 보이지 않는다.
에세이 인기
최근 아이돌, 배우, 가수 등 다양한 직군의 연예계 스타가 책을 출간하고 있다. 종류도 다양하다. 소설, 시나리오, 자기계발서, 요리책 등 여러 분야의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TV, 유튜브 등 화면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인기스타가 책을 통해 팬들과 소통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일반인이 경험하지 못한 연예인의 삶을 녹여내 자전적 이야기를 담는 에세이가 인기가 많다.
물론 글을 쓰는 전문 작가가 아닌 이상 책 한 권을 써내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책 한 권의 분량은 200자 원고지 600매. 글자 수는 약 12만자 정도 되며, A4 용지 70~80페이지가 된다. 시간이 금쪽 같은 연예인에게 최소 몇 달에서 1년 가까이 글 쓰는 것에만 집중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대필 작가는 ▲출판사와의 만남 ▲계약 ▲집필 총 세 단계를 거쳐 작업이 진행된다. 출판사가 책을 출간하고 싶다면 원저자와 협의를 한 뒤 콘셉트에 맞는 대필 작가를 물색한다. 출판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맥을 총동원해 유능한 대필 작가를 알아본다.
그렇다고 해서 유능한 대필 작가가 모든 장르를 잘하는 건 아니다. 대필 작가 세계에서도 분업화·전문화돼있다. 예를 들면 에세이 전문 대필 작가에게 경제 입문서를 맡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뜻이다.
출판사와 대필 작가가 연결되면 이메일과 전화 등을 통해 계약서 내용을 조율한다. 송달 역시 이메일과 등기우편을 통해 이뤄진다. 계약 형태는 ‘출판(인세) 계약서’ ‘출판권 설정 계약서’가 아닌 ‘원문 계약서’ ‘집필 계약서’ ‘외주 계약서’ 등 변형된 형태다.
집필 절반 이상 남의 손으로
초고부터…실질적 저자 역할
비밀유지 같은 구체적인 항목을 직접 기재하는 경우는 드물다. 문서화하지 않아도 ‘보안’은 이 바닥에서 불문율이다. 의뢰인(원저자)과 편집자, 대필자가 대면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대필은 주로 자서전, 평전, 재테크, 자기계발서, 실용서, 에세이 등으로 이뤄진다.
추세에 맞춰 속성으로 펴내야 하는 특성 때문이다.
대필 기간은 원고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3개월에서 6개월이다. 작업 과정도 ▲자료수집과 취재 인터뷰 ▲집필 ▲교정·수정작업 세 단계로 이뤄진다. 대필 작가는 실질적인 원저자의 몫을 하고 있다. 한 대필 작가는 3년여에 걸쳐 책에 대한 기초조사부터 현장답사, 아이디어 제공, 초고 수정까지 전담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대필 작가가 혼자 골방에 들어가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원저자나 출판사가 글을 의뢰하면 그들이 이야기해주는 것과 보내준 다양한 자료를 가지고 내용을 정리한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원저자와 5~6번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공동작업을 하는 것이다.
원저자의 깊은 생각을 일반인들이 보기 쉽게 풀어쓰는 작업이다.
대필 작가 수입은 장르와 경력에 따라 편차가 매우 크다. 초보자 경우 연봉 1000만원이 채 안 된다. 하지만 경력이 오래될수록 연봉은 올라간다. 경력이 쌓이면 월 1000만원 이상 벌기도 한다. A4 용지 50매를 기준으로 희곡·영화 시나리오는 1500만~3000만원선, 단행본은 수백만원 선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A급 대필 작가’는 권당 1500만원에서 2000만원 사이로 훌쩍 뛴다. 대필 작가가 집필하는 데 있어 아무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원고를 써야 할 경우 액수는 좀 더 올라가기도 한다.
시나리오 3000만원
단행본은 수백만원
하지만 대필 작가는 업계 관행으로 인해 계약된 책정된 원고료를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대필 작가의 저작권은 ‘법전’과 ‘서류’ 상에서만 해당한다. 실제 업계에서는 대필했을 경우 저작권은 원저자에게 완전 귀속시키는 것으로 계약조항에 넣는다.
혹여나 저작권법을 내세워 대필 작가가 소유 저작권을 주장한다면 저작권 시장에서 미운털이 박힌다.
한 정치인은 보좌관, 비서관으로 채용해줄 것처럼 대필을 시켜놓고, 선거 뒤 모르쇠로 일관하며 원고료 비용조차 지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불법 대필에 수요도 아직 많이 남아있는 상태다. 불법 대필이란 논문, 법률, 공모전 대필 등을 말한다. ▲법률문서대필은 변호사법 위반 ▲논문은 업무방해죄 등에 해당한다. 한국 대필작가협회(이하 협회) 내에서는 논문, 사업계획서, 법률문서 대필은 하지 못하도록 규정돼있다.
임재균 작가는 대필 작가가 감수해온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계약과 관행 때문에 2015년 협회를 만들었다. 대필 작가라는 직업을 양성화하고 대필 작업이 갖는 부정적인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다.
현재 소속 작가는 약 500여명으로 문단 작가는 물론 번역, 시나리오, 웹소설, 방송 분야에 작가들도 전업 혹은 부업 대필 작가로 일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베스트셀러를 출간했던 작가도 있다.
대필 작가들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는 이유는 한국 특유의 체면문화에 기인한다. 외국의 경우 대필 작가는 전문직으로 원저자와 함께 이름이 실린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필’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원저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임 작가는 밝혔다.
대다수 양식 있는 출판인들은 대필을 대중 소비사회의 필요악으로 인정하면서도 대필 여부를 밝히지 않는 것은 독자들을 속이는 사기행위라고 말한다.
양성화
최근 협회는 언론, 유튜브 활동 등 미디어에 노출하며 양성화를 꿈꾸고 있다. 협회 주도하에 표준 계약서도 생기면서 대필 작가가 민간 자격증도 등록하기 시작했다. 임 작가는 “앞으로 해외 대필 작가와의 네트워크를 강화해 국내보다 선진적인 북미, 유럽권의 대필 문화를 도입하고 싶다. 이후 협회 소속 작가들을 위한 1인 작업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목표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