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아트인> 4년 만에 돌아온 양혜규

2019.09.30 11:20:21 호수 1238호

미래서 마주한 과거의 희망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서울과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세계무대서 활동 중인 양혜규 작가가 오랜만에 국내 개인전으로 관객들과 만난다. 국제갤러리서 선보이는 첫 번째 전시이면서 2015년 삼성미술관 리움서 진행한 개인전 이후 4년 만이다.
 

▲ 국제갤러리_양혜규_보물선_1977


양혜규 개인전 ‘서기 2000년이 오면’은 가수 민해경의 노래 ‘서기 2000년’서 따왔다. 미래를 향한 낭만과 희망을 담은 이 노래는 전시장으로 가는 길목서 관객들을 맞이한다. 관객은 노래가 가리키는 미래의 시점이 훌쩍 지나버린 위치서 과거의 희망을 마주한다.

상상과 연대

2000년이라는 시간성에는 과거와 미래의 시점이 동시에 녹아있다. 관객들은 ‘지금 여기’서 노래에 담긴 당시의 정서를 더듬으며 시간을 한층 더 복합적으로 느낄 수 있다.

양혜규는 흔히 연관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역사적 인물들의 발자취나 사건들을 실험적인 방법으로 읽어왔다. 또 사회적 주체, 문화, 시간이라는 개념에 다원적이고 주관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 이번 전시는 소리 나거나 움직이는 일련의 조각 연작이 다양한 감각적 요소와 조우하고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상상과 연대의 공간이다.

전시의 홍보 이미지로 공개된 ‘보물선’은 유년의 양혜규가 두 동생과 함께 그린 그림이다. 도깨비, 시조새 등 상상의 산물들이 유쾌하게 어우러진 이 크레파스 수채화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새로운 시공간을 원시·신화적 요소로 재현했다.


노래와 그림, 두 개의 시청각 기표는 저마다의 시간과 장소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과 막연한 향수를 불러오면서도 시공간에 얽혀 있는 복합적인 감각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번 전시는 공간 전면을 감싼 벽지 작업, 움직임과 변화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조각물, 감각을 일깨우는 촉매적 요소로 구성돼있다.

전시제목은 노래서
유년기 그림도 소개

먼저 유기적이고 입체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벽지 작업 ‘배양과 소진’은 독일의 그래픽 디자이너 마누엘 래더와의 협업 작품이다. 지난해 프랑스 몽펠리에 라 파나세 현대예술센터서 개최한 개인전서 처음 공개됐다.

이교도적 전승문화의 흔적과 근현대 이후 융성한 교육, 하이테크 산업 문화가 공존하는 프랑스 남부 옥시타니아 지역이 배경이다.

작품에는 양파와 마늘, 무지개와 번개, 의료수술 로봇, 짚풀, 방울 등 각양각색의 사물이 마구잡이로 병치·배열돼있다. 지역적 경계를 넘어 과거와 현재, 기술과 문화, 자연과 문명이 융합된 이 작품은 이번 전시 공간서도 문화와 민속에 대한 기존 분류법에 반하는 양혜규의 관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관객 참여를 이끌어내고 작품에 운동성을 부여하는 양혜규의 경향은 다차원적 공간에 위치한 ‘솔 르윗 동차’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장 중앙에 위치한 이 작품은 기존의 블라인드 작업에 동적 요소가 더해져 탄생한 새로운 연작이다.
 

▲ 국제갤러리_양혜규_소리 나는 운동 지도_2019

양혜규는 2000년대 중반부터 바람, 빛, 온기 등을 전하는 감각적 소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거의 같은 시기부터 공간을 양분하면서도 개방과 폐쇄의 양가적 특성을 가진 블라인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솔 르윗 동차 연작은 미니멀리즘의 대표 작가 솔 르윗의 입방체 구조를 물리적, 개념적으로 확장시킨 ‘솔 르윗 뒤집기’ 연작과 조각물을 입듯이 사람이 조각 내부로 들어가 조각 자체를 움직이게 돼있는 ‘의상 동차’ 연작이 혼종된 작업이다.

한 면이 70㎝ 입방체로 구성된 솔 르윗 뒤집기는 르윗의 모듈식 구조를 뒤집어 천장에 매단 블라인드 조각물이다. 반면 솔 르윗 동차는 르윗의 모듈 구조를 위아래로 세우고 기립시켜 형식적 진화를 도모했다. 모체가 되는 두 연작의 개념적 맥락은 유지하되 내부가 아닌 외부서 동차를 조종하게 했다. 2명 이상의 관객이 함께해야 가장 이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동차와 대각선상에 놓인 공간의 양 모서리에는 ‘소리 나는 운동’ 4점이 천장에 매달린다. 방울을 전면에 내세운 ‘소리 나는 조각’ 연작서 유래했다. 매달린 조각의 원형 몸체를 손으로 회전시켜 독특한 시각적 문양과 청각적 울림을 자아내는 소리 나는 운동은 기존에 없던 손잡이, 인조 짚 등의 요소가 추가로 접목된 작업이다.

남북 도보다리 회담 새소리
동시대 인물의 역사적 상황

작품이 활성화돼 움직일 때, 방울은 속이 빈 물체를 흔들거나 두드리며 침묵과 부동의 상태를 소리와 호출로 확장시킨 인류의 보편적 경험을 일깨운다. 또 자연서 문화로의 이행, 공예와 대량 생산으로 치환되는 문화와 산업의 결합을 암시한다.

천장에 매달린 2개의 스피커 묶음서 흘러나오는 새소리는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 영상서 추출한 것이다. 당시 남북의 지도자가 도보다리 끝에 함께 앉아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먼발치서 포착한 영상에는 세계 각지서 모여든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와 발소리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 담겨있다.

얼핏 평범한 소리처럼 들리는 이 음향은 비무장지대(DMZ)라는 특이한 장소가 함의하는 인간 사회의 서사와 정치적 복선, 자연이라는 인류세를 벗어난 보편적 공간 사이의 비밀스러운 틈새를 연다.
 

▲ 국제갤러리_양혜규_서기 2000년이 오면

대지의 내음과 음향, 안개와 빛으로 가득한 공간 한편에는 비시각적 작업인 ‘융합과 분산의 연대기-뒤라스와 윤’이 텍스트 묶음으로 비치됐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의 연대기를 주관적 관점으로 교차편집한 것이다. 동시대에 사회적, 정치적 격변기를 살아간 두 인물은 양혜규의 작업서 종종 직접적으로 혹은 우회적으로 참조돼왔다.

연대기는 두 인물의 생몰 전후의 역사적 상황을 시작과 끝으로 한다. 이들의 생애는 식민주의와 냉전시대, 일련의 사회적 변혁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이어진다. 이 작업은 그에 내포된 드라마와 매혹, 이면의 고통과 소외의 정서가 도드라지는 방식으로 연대기를 재현한다.

소외된 문화

국제갤러리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양혜규의 독특한 어법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일상적 어휘를 특유의 반복과 상호 교차, 혼성으로 뒤얽는 어법을 통해 인류 역사와 문화, 사회의 다양한 파고와 너비를 아우른다”고 설명했다. 이어 “양혜규는 이번 전시서 과학적 합리성과 자본주의가 소거한 수공과 자연의 가치, 사변적 영역을 비롯해 야만의 역사가 폄훼한 원시문화를 조명한다. 또 인간 세계의 산물인 시스템이 소외하고 고립시킨 정치사회적 인물과 공간을 다시금 폭넓게 바라보기를 권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11월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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