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회 ‘날치기 헌정사’ 천태만상

2011.11.28 09:30:00 호수 0호

머릿수로 횡포부리다 민심의 철퇴 맞았다

[일요시사=서형숙 기자] 정국이 얼어붙다 못해 마비된 모양새다. 지난 22일 한나라당이 한미FTA 비준안을 기습적으로 통과시키면서다. 이는 MB정부에서만 다섯 번째 ‘날치기’로 꼽힌다. 특히 여야에서 국회선진화법이 논의되던 와중에 터진 일이라 충격은 배가되고 있다. 역대 국회에서 다수당의 법안 날치기 처리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는 민심의 역풍이라는 부작용을 낳았음에도 끊이지 않는 악습으로 자리 잡았다. 역대 국회의 날치기 천태만상을 <일요시사>가 살펴봤다.

국회의 날치기에 민심의 역풍…‘몰락의 전주곡’
독재정권 시절 야당에 무력행사 기습처리 빈번



‘말 많고 탈 많은’ 한미FTA 비준안이 지난 22일 국회를 전격 통과했다. 한나라당 주도하에 기습적으로 본회의가 열리면서 한미FTA 비준안이 강행처리된 것이다. 야당 측은 날치기 처리된 한미FTA 비준안의 원천무효를 선언하며 투쟁의사를 밝혔다. 이어 예산심의를 포함한 이후 모든 국회 의사일정을 전면 거부하는 보이콧을 선언해 정국이 바짝 얼어붙은 상태다.

이승만 정권에서
날치기 악습 시작

역대 국회를 돌이켜보면 다수당의 날치기는 항상 민심의 역풍을 불러왔다. 그럼에도 날치기 의 고질적 병폐가 고쳐지기는커녕 보다 치밀하게 진화하며 국회 악습으로 자리 잡는 모양새다.

날치기의 역사는 이승만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자유당이 통과시킨 발췌개헌이 날치기의 효시다.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재선을 위해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국회에서 부결됐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포위했고, 그해 7월4일 여당 의원들만 참석시킨 채 재투표를 진행해 개헌안을 처리했다. 이것이 악명 높은 발췌개헌이다.

이로 인해 1956년 정?부통령 선거와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패하며 여당인 자유당에 대한 민심이반이 확인됐다. 결국 이승만 정부는 다시 언론, 국민의 비판규제를 위해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야당을 중심으로 범국민적 반대투쟁이 전개되었다.
1958년 12월24일 이 전 대통령은 다시 무술 경관을 동원해 폭력으로 농성 중이던 야당 의원들을 국회 본회의장서 끌어내고 지하실에 연금했다. 또 다시 자유당 의원들만 구성된 채 국가보안법이 통과됐다.

그리고 개정된 보안법을 적용해 이 전 대통령과 접전 끝에 낙선한 죽산 조봉암 선생을 간첩혐의로 사형시켰고, 뒤이어 죽산이 결성한 진보당도 해산시켰다. 이로 인해 촉발된 성난 민심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당시 사형된 조봉암 선생은 사형당한지 52년 만인 올해 1월에 대법원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노동법·탄핵안
정국 최대 파장

1969년 공화당 의원들의 날치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전격 도모했다. 그해 9월14일 새벽2시30분 공화당 의원들은 국회 제3별관(현 서울시의회)에 전등을 끈 채 몰래 모인 뒤 박 전 대통령의 3번째 대통령 연임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이어 박정희 정권은 1979년 당시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 의원 제명안 처리를 위해 국회 경호권을 발동했다. 공화당은 회의장을 옮겨 단독으로 제명안을 의결했고,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은 의원직 사퇴서를 내고 극한투쟁에 돌입했다. 이로 인해 부마항쟁 등 민주화운동이 전국에서 발발했고, 박정희 정권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85년 12월 여당이었던 민정당은 신민당이 본회의장을 밤새 점거하자 의원총회를 하겠다며 새벽에 국회 146호실에서 소속 의원들만 모인 가운데 최영철 국회부의장 주도로 새해 예산안을 단독 처리했다.

1986년에는 국시발언 주역인 유성환 신민당 의원 구속동의안 처리를 놓고 야당이 본회의장을 점거하자 민정당은 경위와 경찰을 동원해 국회 로텐더홀을 가로막은 채 예결위 회의장 뒷문을 통해 기습적으로 들어가 체포동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시에도 민심이반이 가속화 되며 1987년 6월 항쟁의 불씨를 제공하였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는 가장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은 ‘제3자 개입금지’ 등을 위해 노동법 개정을 추진했다. 하지만 야당과 노동계의 반발로 진척이 없었다. 이에 같은 해 12월26일 새벽 신한국당 의원 155명은 본회의장에 몰래 모여 노동법 등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야당은 격렬하게 반발했고, 노동계의 파업은 한 달여간 이어졌다. 파업 등으로 3000여명이 구속되는 전례 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놀란 여당은 1997년 3월 야당 및 노동계와 협상을 통해 민주노총을 합법화하고, 3자 개입금지 조항을 없애는 내용으로 노동법을 재개정했다.

하지만 민심은 여당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이후 한보사태에 이어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나라당은 1997년 대선에서 패배하며 정권교체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노동법개정안·노무현 탄핵안 가장 큰 파장 일어
총·대선 앞두고 날치기, 한나라 민심동향에 촉각


한나라당의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 강행처리도 기록에 남을 날치기였다. 2004년 3월 야당이었지만 다수당인 한나라당은 옛 민주당과 함께 소수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의 저지를 물리력으로 봉쇄하고 노 전 대통령의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하지만 촛불집회 등 범국민적 저항에 직면했고, 같은 해 4월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대패했다.

이어 17대 총선으로 전세가 역전된 열린우리당은 2005년 12월9일 한나라당과 몸싸움 끝에 직권상정을 통해 ‘개방형 이사제’를 골자로 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한나라당은 당시 박근혜 대표 주도로 장외투쟁에 나섰고, 사학재단과 종교계 등이 날치기라며 극렬하게 반발했다. 이에 열린우리당의 정국 주도력이 위축됐고, 사학법은 결국 2007년 재개정됐다.

이명박 정권에서도 예외 없이 국회 날치기가 성행했다. 4년차 되는 현 정권에서 무려 다섯 번의 날치기가 이뤄진 것. 첫 번째 날치기는 지난 2008년 12월13일 새해 예산안 처리였다.

당시 김형오 국회의장은 여야가 2009년도 예산안 처리시한(12일)에 최종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자 다음날 직권상정으로 본회의에 예산안과 부수법안 등을 통과시켰다. 종합부동산세, 양도소득세 등의 감세법안도 함께 처리했다. 당시 이른바 ‘형님 예산’으로 불렸던 포항지역 예산은 대폭 증액되며 비판여론이 거셌다.

두 번째 날치기는 대기업·신문의 방송 진출을 가능케 하는 미디어법 처리였다. 지난 2009년 7월 여야는 미디어법 개정안 처리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다 레바논 파병연장 동의안 처리를 위해 본회의가 잠깐 열린 15일, 여야는 상대편 점거를 막기 위해 본회의장에 남아 며칠간 동시농성을 벌이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후 22일 당시 이윤성 국회부의장은 김형오 국회의장으로부터 사회권을 넘겨받아 미디어 관련 3법을 직권상정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경제 살리기를 위해 미디어 시장의 세계화를 위한 경쟁력 강화를 위해 미디어 법통과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야당과의 물리적 충돌을 불사하고 재투표와 대리투표 등의 불법과 편법을 동원해 야당의 극렬한 반반을 샀다.

MB정권 4년
5번의 날치기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미디어 산업을 통한 경제 살리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친정부 성향의 보수언론 4개사의 종편을 허가하기 위함이었다는 비판이 아직까지 일고 있다.

야당은 미디어법 처리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야당 의원의 권한 침해가 인정된다”면서도 법안무효 청구는 기각했다.

2009년 12월31일 2010년도 예산안과 부수법안을 두고 세 번째 날치기가 있었다. 당시 여당은 본회의 처리 전 예결위원회의 예산안 처리를 거쳐야 한다.

당시 예산안 처리를 예결위 회의장이 아닌 국회 245호 회의실에서 불시에 강행했다. 이어 당시 김형오 의장은 본회의를 열고 예산안과 부수법안들을 통과시켰다. 이에 김 전 의장은 ‘역대 최다 직권상정 국회의장’이라는 오명을 쓰며 이듬해 5월 퇴임했다.

박희태 국회의장 취임 후에도 여전히 날치기 처리는 계속됐다. 2010년 12월8일 새해 예산안이 날치기 처리된 것. 당시 4대강 주변지역의 개발을 가능케 하는 친수구역활용특별법, UAE파병동의안 등 쟁점 법안도 함께 날치기 처리됐다.

다섯 번째가 이번 한미FTA 비준안의 기습처리다. 당시 사회권을 넘겨받은 정의화 국회부의장은 본회의 비공개 동의안부터 상정해 단 4분만에 전광석화처럼 한미FTA 비준안 및 이행법안들을 통과시켰다.

이처럼 집권당이나 다수당의 날치기 처리의 병폐는 헌정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독재정권 시절에 벌어진 대표적 날치기들도 야당의 강한 반발과 민심의 역풍을 맞았다. 종국에는 ‘날치기 세력’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등 역대 헌정사에서 날치기에 대한 결과는 혹독했다.

이번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날치기 처리한 한나라당이 여론의 향배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내년에 본격 선거정국을 앞두고 선 날치기 후 민심수습에 들어간 한나라당. 과연 국민들은 한나라당에 대해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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