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6일 87세의 일기를 끝으로 타계한 아널드 파머는 ‘아니(Arnie: 아널드의 약칭)의 군대(Arnie’ Army)’라는 엄청난 팬들이 쫓아다녔고 이 중에는 골프에 문외한도 있었다고 한다. 파머는 이 군대를 이끄는 왕이었다.
눈물의 이별식…추도식 5000명 집결
골프스타들 총출동해 가는 길 배웅
미국프로골프(PGA)투어 통산 62승을 거둔 파머는 통산 73승을 올린 후배 잭 니클라우스(76·미국), 게리 플레이어(81·남아공)와 함께 ‘빅3’로 통했지만 인기는 항상 최고였다. 잘생긴 얼굴과 화려하고 공격적인 경기 스타일, 카리스마가 큰 무기였다. 굵은 팔뚝으로 힘차게 휘두르는 장타와 어떤 상황에서도 버디를 노리는 공격적인 플레이에다 승부처에서 어김없이 홀을 찾아드는 퍼팅은 수많은 시청자를 TV 앞으로 끌어들였다.
골프 하나로 억만장자가 됐지만, 아널드는 이른바 ‘흙수저’ 출신이다. 소아마비를 앓았던 아버지는 골프장에서 골프 레슨과 코스 관리를 생업으로 삼았고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다. 아버지는 파머에게 3살 때 여성용 골프 클럽을 손에 쥐여주면서 “공을 힘껏 때려. 그러곤 볼을 찾아서 다시 힘껏 때려”라고 가르쳤다. 파머가 평생 공격적인 파워 골프를 구사하게 된 이유다.
전설의 뒷모습
프로 전향 전에도 파머는 아마추어 대회에서 26차례 우승을 거머쥐었다. 파머는 1974년에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입회했고, 1998년에는 PGA투어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그가 이런 전설적인 인물이 된 배경에는 그의 겸손함이 있었다.
빅3 중의 한 명이었던 니클라우스가 파머의 거대한 저택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파머의 집에는 그 수많은 우승컵이 보이지 않고 달랑 우승컵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니클라우스가 놀라서 물었다. “당신이 그동안 받았던 수많은 우승컵들은 어디에 있나요?” 파머가 답을 한다. “없어요. 내가 가진 우승컵은 이게 전부입니다” 파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는 니클라우스에게 남긴 일화는 유명하며 곱씹을 만하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대회에서 우승했고 수백 개의 우승컵과 상을 받았지만, 그것들은 별 의미가 없다. 가장 값진 우승컵 하나만 남겨두었을 뿐이다. 이것은 내가 프로가 된 뒤 처음으로 출전한 경기에서 따낸 우승컵이다. 그때 나는 최선을 다해 경기를 펼치겠다는 남다른 각오를 했고, 지금도 이 우승컵을 볼 때면 그때의 결심을 떠올리며 초심으로 돌아간다.” 이 말을 가슴에 담아 PGA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니클라우스가 파머의 사망 소식에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이유다.
파머는 사인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사인을 해줬다. 가능하면 많은 팬과 악수를 하고 대화를 하고 싶어 했다. 파머는 1960년대 록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미국)와 인기가 맞먹었지만 늘 팬들과 소통하고 접촉했다는 점이 달랐다. 파머는 전 세계 300개 이상의 골프 코스를 설계했고, 플로리다에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아놀드 파머 메디컬센터’를 설립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PGA투어 대회도 개최해왔다. 후배 선수들은 파머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하곤 했다.
애도의 물결
아놀드 파머(미국)는 생전에 장례식과 추모식 참석을 유독 싫어했다고 한다. 사람들의 슬픈 표정을 보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 스포츠 전문매체 <ESPN>은 “파머는 가족, 친구와 이별하는 날이 오기 전 최대한 많이 만나 함께 삶을 즐기길 원했다”면서 “사람을 껴안고 눈을 맞추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능력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가 떠난 펜실베이니아주 라트로브 세인트빈센트칼리지에서 열린 파머의 추도식에 5000명의 인파가 몰렸다. 파머가처음 골프를 배웠던 라트로브CC에서 멀지 않은 이 대학의 바실리카식 행사장 건물에는 1000명의 추모객이 들어찼다. 대학 교정에는 건물에 들어가지 못한 5000명의 추모객들이 몰렸다. 이 매체는 지난 1999년 페인 스튜어트가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에 올랜도의 교회에서 열렸던 추도식의 3000명보다 많은 수라고 말했다.
골프계의 전설과 현직 스타들도 총출동했다. 잭 니클라우스, 리 트레비노, 톰 왓슨 등이 고인을 추모했고 파머와 같은 해(1929년)에 태어난 밥 골비, 다우 핀스터발드 등의 골프의 전설도 고인의 마지막 기념식 자리를 빛냈다. 라이더컵 미국 팀 단장 데이비스 러브 3세를 비롯해, 필 미켈슨, 버바 왓슨도 참석했다. 가장 젊은 프로인 27세의 리키 파울러는 8년 만에 되찾은 라이더컵을 안고 추모장을 찾았다. 라이더컵 첫날 1번 티잉 그라운드에는 아놀드 파머가 단장으로 있으면서 유럽팀을 절반 스코어로 제압했던 1975년 골프백이 놓여 미국 팀 선수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2시간가량 진행된 추도식은 짐 낸츠가 사회를 맡아 8명이 추도사를 읽었다. 낸츠는 “내 생에 이런 인사들이 다 모인 건 처음”이라고 시작했다. 잭 니클라우스는 눈물을 흘리면서 추도사를 읽고 “아놀드 파머가 당신의 인생을 움직이고 당신의 가슴을 뛰게 하던 그때를 기억하고, 왜 그랬는지를 잊지 말기 바란다”고 마무리했다. 골프선수인 파머의 외손자 샘 손더스는 파머가 죽기 몇 시간 전에 나눈 통화를 언급하면서 “늘 그래왔듯 할아버지는 내가 어디 있는지 묻고는 가족을 잘 돌보라고 당부했다”면서 자신은 그 전화번호를 평생 간직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