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제가옥’ 직접 가보니…

2016.02.16 14:37:05 호수 0호

친일파 한상룡 살다 도망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가회동엔 ‘한씨 가옥’이라고 불리는 집이 두 채 있다. 정독도서관(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전 경기고)과 A그룹 회장 저택 사이에 위치한 백인제가옥과 맞은편 산업은행관리가라고 불리는 근대한옥이 그것이다. 전자는 1913년에 건립돼 올해 103년을 맞은 한옥으로 대지 907평, 건평 165평에 달하는 근대한옥이다. 후자 역시 규모는 이보다 덜하나 가회동에서 윤보선가옥과 백인제가옥에 이어 세 번째로 큰 한옥이다.



두 가옥 모두 일제강점기 유명한 친일파이자, 금융가였던 한상룡이 소유했던 집이다. 한상룡은 백인제가옥에서 1928년 7월까지 15년을 살았고 이후 산업은행관리가로 이사가 1946년 일본으로 도주할 때까지 살았다. 그는 도쿄에서 일본인들의 외면 속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바로 옆집인 177번지는 역시 친일파로 유명했던 박흥식이 거주했다. 후에 명당자리라고 소문이 나면서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사들였다. 

구한말 한상룡 한성은행 취업

한상룡은 한성은행(조흥은행, 현 신한은행) 전무로 일하던 불과 33세의 나이에 백인제가옥(1944년 집을 사들인 백인제 박사의 이름을 따 명명)을 건립했다. 인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장 높은 지대에 조성된 집으로, 일가 14명의 대가족이 해당 가옥에서 살았다.

옆집인 A그룹 회장의 저택도 최초엔 원래 필지에 속했다. 한상룡이 젊은 나이에 대저택을 소유할 정도로 성공했던 것은 그의 가문 배경에서 기인했다. 평생의 후견인이었던 완순군 이재완(고종의 사촌), 이완용(외숙), 이윤용(외숙, 대원군의 사위)을 통해 총독부 및 재계에 큰 영향력을 일생 동안 유지했다.

구한말 한상룡은 같은 양반 출신들이 대부분 관료로 입신 출세할 때 한성은행에 취직해 기업가로서의 길을 일찌감치 시작했다.


한상룡은 일제하 한성은행, 조선생명, 조선신탁 등 금융업을 중심으로 기업활동을 하며 평생 동안 무려 300여개의 각종 기업 설립과 경영에 관여했다. 그는 김성수-김연수 형제나 민씨일가, 박흥식, 장직상, 현준호처럼 자기 자본을 가지고 거대기업군을 일군 대자본가는 아니었으나 세계경제에 대한 식견을 갖고 재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전문경영인’(CEO)으로 평가받았다.

일제강점기 경제발전에 기여한 만큼 한상룡의 ‘매국행위’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시부사와 에이이치, 메가타 다네타로를 조선의 3대 은인이라고 칭하고 그들을 포함해 역대 총독들의 송덕비, 동상 건설 및 전기 편찬을 주도했다.

또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른 ‘만주 붐’에 관심을 갖고 전쟁, 군수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인을 강제노역시키던 기업들이다. 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각종 시국강연회 및 담화를 통해 일제정책을 선전하고 전쟁협조 여론을 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전쟁이 본격화되자, 국방헌금을 내고 지원병, 학도병, 징병 독려에 나섰다.

한상룡은 1906년 가회동 93번지로 이사 와 1912년까지 인접한 가옥 12채를 매입해 부지를 확보, 다음해 저택을 완공, 7월부터 거주했다. 가옥은 첫눈에도 골목길에 면한 넓은 출입마당이 돋보이는데, 자가용 소유자가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이축된 높은 화강암 계단을 오르면 당시 경성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 역할을 했다.

입구에 들어서서 사랑중문을 통과하면 널찍하고 탁 트인 사랑마당이 극적으로 펼쳐진다. 사랑채 담장은 당시 신식재료였던 붉은 벽돌을 써서 한상룡 자신의 현대성을 적극적으로 대변했다. 개화기의 서양 선교사 주택이나 서양식 건물에 적용된 최신재료와 구법에 영향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24년간 거주하다 일본으로 도주
“히로부미는 은인” 대표적 매국노

가옥은 서쪽의 안채와 동쪽의 사랑채로 나뉘는데 사랑채와 사랑마당은 가옥의 얼굴이자 중심, 최고의 위계공간이다. 잔디가 깔린 넓은 사랑마당에서 한상룡은 총독, 기업가, 고위관료, 귀족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다.

역대 조선총독이 모두 가옥을 방문했고 일본 정재계 인사들과의 교류의 장이자 장안의 명소였으며 석유왕 록펠러 2세가 내한시 방문할 정도였다. 가옥 자체에서 그의 권력과 야심, 사회활동의 규모를 엿볼 수 있다.

가옥의 기둥 높이도 3.1m로 운현궁에 맞먹는 높은 주고를 자랑한다. 대들보도 일반 한옥보다 높다. 현재도 구하기 어려운 ‘만주 흑송’을 최초로 사용한 집이기도 하다. 실제로 서울시는 흑송을 구하지 못해 홍송으로 가옥을 복원했다.

최신식 근대요소와 의도적 일본요소를 도입해 건립 당시 최고 수준의 건축물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를 따로 짓지 않고 속복도로 연결한 선구적인 시도가 눈에 띈다. 당시로선 귀했던 유리창과 외국서 수입해온 정원수, 일본식 벽장, 특히 안채 일부를 2층으로 만든 것은 낙성 당시에도 기사화 될 정도로 화제가 됐다.


아내가 머무는 안채는 겹방 형식을 수용해 사대부 가옥에선 보기 힘든 3칸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이는 궁궐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형식으로 한상룡이 아내를 각별히 사랑하는 가정적인 성격이었음을 드러내준다.

또 조선 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무늬’가 안채와 사랑채 벽에 두루 쓰인 것이 특기할 만한 점이다. 일본 정재계 인사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집임에도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무늬를 적용한 것은 한상룡 본인이 왕족 집안이라는 점을 과시하는 자존심의 표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일 가옥 공존의 근대한옥

오늘날 백인제가옥은 근대양식과 전통양식, 사랑채의 사회성과 안채의 개인성, 한옥과 일본가옥 요소가 공존하는 실험적이고 선구적인 양식의 근대한옥으로 평가받는다.

박상욱 ㈜건축사사무소 자향헌 대표는 <한상룡가옥의 원형과 조영개념>에서 “한옥을 근간으로 한 목구조를 바탕으로 근대적 합리성이 구현된 집이자 전통적 한옥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근대성을 수용한 실험적 도시한옥”이라고 정의하고 “친일의 대가로 부여받은 지위와 조선경제의 일본 예속화를 향한 활동으로 축적한 자본으로 지어지고 그런 건립동기와 목적으로 활용된 건축이란 점에서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가옥은 그 건축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근대기의 씁쓸한 유산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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