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인터뷰 -어떻게 지내십니까> ‘마지막 황손’ 이석

2015.11.30 11:29:08 호수 0호

“어떤 사람이 될까? 지금도 고민해요”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승광재(承光齋)는 고종의 연호인 ‘광무를 이어간다’는 뜻의 이름으로 조선 26대 임금 고종의 손자이자 마지막 황손 이석 황실문화재단 총재가 사는 곳이다. 한때 국민가요로 불린 ‘비둘기 집’을 부른 가수이기도 하다. 지금은 승광재에 자리를 잡고 황실문화재단의 초대 총재로 대학의 역사 문화 교수로 해설사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나본다.



스러진 대한제국 황실 종친 이석 총재. 이 총재는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 의친왕의 아들이다. 왕자로 태어난 그의 일생은 누구보다 파란만장하다. 궁에서 쫓겨나 식당을 열었고, 절집을 떠돌다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현재 기거 중인 전주 한옥마을에서 그를 만나 근황과 남은 포부를 들었다.

비운의 왕자

그는 자신의 유년시절과 부모의 관한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의친왕께서는 당시 62세, 어머니께서는 창덕궁 전화 교환원이었습니다.”

딸 부잣집의 장녀였던 그의 어머니는 피부가 하얗고 선한 외모의 단아한 여성이었다.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간 궁에서 의친왕의 눈에 들어 1941년 왕자 이 총재가 태어나게 된다. 그는 어린시절을 만평정도의 규모와 십여 채의 한옥 공간이 있는 사동궁에서 보냈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던 그에게 첫 시련은 6·25 전쟁이었다.


“제가 9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버님은 저희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의 포교원으로 피난을 했습니다.” 전쟁 후 어려운 생활이 이어지다 1955년 8월15일 의친왕이 임종한다. 무더운 여름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동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뤘다. 의친왕의 임종 후 가족의 생활은 어렵고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고달픈 인생의 서막이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후 저는 가장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안해본 일이 없는 그는 타고난 목소리가 좋았다. 사회도 보고 음악다방에서 DJ활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중 한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우연하게 노래자랑 대회에 참가해 1등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룬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작은 돈을 벌어서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곤 하면 어머니께서는 슬픈 표정을 지으시며 저를 안타까워하셨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삶의 유일한 낙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큰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던 것이다. “‘나라가 망하더니 왕손이 광대가 되었구나’하시며 땅을 치며 통곡을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는 차라리 젊은 몸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월남 파병에 자원입대 했다. 월남 파병중 부상을 입은 그는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와야만 했다. 어머니는 그 충격과 스트레스로 그가 고국에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활고 때문에 가수로 활동
처지 비관해 극단적 선택도

“동생들과 저는 힘든 날을 보내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매일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그에게 한 작곡가가 찾아오게 되는데 월남에서 있었던 부대 이름을 따 ‘비둘기 집’ 이라는 노래를 들고와 그에게 가수가 되기를 권했다. ‘비둘기처럼 다정한∼’으로 시작하는 노래는 한번쯤 들어본 곡일 것이다. 하지만 가수 이석으로서의 삶도 오래가진 못했다. ‘외로운 조약돌’, ‘두마음’ 등 노래가 나왔지만 외로움과 힘든 부분을 채워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1979년 10·26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칠궁에서 살았습니다.”


사적 제149호인 칠궁은 조선 왕의 친모이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신군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청와대 인근인 이곳에 살고 있던 이석 황손을 헌병대를 동원해 내쫓았다. 조선왕실 재산환수나 품위유지 같은 것은 바랄 수도 없었다.

그 해 12월9일 그는 “다시는 이 나라에 돌아오지 않겠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잔디깍기, 수영장청소, 술상자 나르기, 이삿짐 나르기 등 힘겨움에 잠시 고국도 잊고 살았다.

“1989년 이방자 숙모와 덕혜고모님께서 낙선재에서 돌아가시자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국을 방문하고보니 고국에 대한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신이 들었습니다.”
 

고국의 대한 사랑으로 다시 돌아온 그였지만, 미국이나 고국이나 힘든 삶은 여전했다. 빈곤한 생활이 이어지자 그는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약을 먹고 도봉산 절벽에 매달린 적도 있다고 했다.

“어느 찜질방에 머무르면서 유서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경복궁 대문에 부딪혀 생을 마감하려 했던 그는 찜질방에서 자신을 알아본 한 주간지 기자의 만류에 자살을 포기했다. 그 기자는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손이 찜질방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그렇게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후 일간지·잡지·외신 할 것 없이 인터뷰 요청이 쇄도해 화제가 되곤 했다. 이를 계기로 전주와의 인연이 생겼다. 한 지인이 주선해 2003년 8월 전주의 한 식당에서 강연을 했다.

이후 당시 김완주 전주시장이 한옥 600채가 들어서는 대규모 한옥마을을 조성하기로 하고 그에게 150평짜리 한옥을 지어줬다. 고종황제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승광재(承光齋)라 이름 짓고 2004년 10월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다.

“당시 62세였는데 따뜻한 전주시민의 환대에 고마운 마음으로 정을 붙이며 살게 되었습니다. 13년간의 생활 동안 어려운 상황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현재 전주시민의 과한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건강하게 지내는 동안 어떻게 보탬이 되는 황손으로 살까, 어떤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까? 늘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다.”

박정희, 노무현…
대통령 인연 눈길


이 총재는 ‘살아있는 역사’라는 별명에 맞게 역대 대통령들과의 일화도 많다. 

“모든 걸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기억에 남는 몇 분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강인에 보이지만 진실성이 있고 정이 많으신 분’이라고 첫인상을 설명했다. “‘황성옛터’를 불러드렸는데 늘 쓰고 다니시던 검정 선글라스 아래로 눈물이 흐르니까 슬그머니 훔치시며 노래를 들으셨습니다. 강인함 속에서 잔잔한 고향 같은 분으로 남아있습니다.”

다음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만남이다. 노 전 대통령은 당선 후 이 총재가 살고 있는 전주에 내려온 적이 있다. 행사 후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황손께서는 무엇이 소원입니까?”하고 물었다. 이 총재는 서울 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인 태조 이성계 할아버지의 어진을 전주의 경기전으로 보내 달라고 간청했고, 2008년 10월23일 어진 봉안행렬이 전주에 내려오게 됐다.

“약속을 지켜주신 것만으로도 노무현 대통령께 감사함을 느낍니다. 노 전 대통령은 오래전 만나왔던 친숙함이 배여 있어서 아주 편한 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내비췄다.

평범한 삶

“박근혜 대통령은 더 조심스럽습니다만 대통령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은 항상 측은지심입니다. 아마도 그 옛날 제가 부모님을 잃고 살았을 때의 기억이 작용한 거겠지요. 첫 여성 대통령으로서 당당하고 건강하게 정국(靖國)을 마무리 해 주실 거라 믿고 먼 발치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행사에서 여러번 뵈었기 때문에 직접 담소 나눌 기회는 없었지만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려운 경제문제, 국제적 관계에서의 대한민국의 위상을 잘 지켜주시리라 믿고 응원하겠습니다.”


<ktikt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이석 부친 의친왕은?

의친왕은 1877년생으로 순종황제보다 세 살 많다. 62세에 이석을 낳았다. 의친왕은 1900년대 초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에 있는 대학을 5년 간 다녔다고 한다.

당시 조선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항일투쟁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그는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기차로 평양을 거쳐 신의주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만주 안둥[安東: 현 랴오닝성 단둥]에 도착했다. 하지만 의친왕이 자택에서 사라지자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전개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다시 국내로 송환됐다.

그의 망명실패로 국내 항일 조직이었던 대동단 조직도 큰 타격을 입었다. 1927년 그 뒤 여러 번 일본 정부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고 끝까지 배일(排日)정신을 지켰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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