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특집> ③명절에 더 그리운 정재계 인사들의 망향가

2013.09.17 08:51:04 호수 0호

"출세하면 뭐합니까? 고향도 못가는 신센데…"

[일요시사=특별기획팀] 태어나서 자란 곳. 마음속에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설과 추석에는 이곳을 찾는다. 바로 고향이다. 그런데 명절만 되면 가슴 한편이 답답한 이들이 있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곳. 38선 너머가 고향인 사람들이다. 그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소개한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 내 아버지 레퍼토리 (중략)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아버지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 번만이라도 가 봤으면 좋겠구나라구요'

가수 강산에가 전쟁 때 북한에서 남하한 모친이 평소 고향을 그리워하던 모습을 보고 만든 '라구요'라는 노래다. 강산에는 잘 알려진 대로 그의 부모가 함경도 흥남 출신으로 6·25 전쟁 발발 이후 거제도로 피난 온 실향민 2세대다. '라구요'의 가사는 고향을 떠나온 이들의 향수를 자극하는데 고향산천에 대한 피난민들의 그리움을 위로한다.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다가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은 풍요와, 오랜만에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는 설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이 고향인, 또는 북한에 부모, 형제가 있는 실향민들에게는 명절이 더 외롭다.

명절 기간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지역구를 다니면서 지역현안과 민심을 살피는 등 분주한 행보를 보인다. 요즘에는 지역정서를 지배한 특정정당에 대한 맹목적 지지가 한풀 꺾였다고 평가됨에 따라 정치인들의 추석 민심탐방을 위한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질 것으로 보인다.

갈 수 없는
그리운 마을


하지만 탈북자 출신의 국회의원 1호,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에게 있어서 추석은 다른 의원들과는 조금 다르다. 조 의원의 고향은 평안남도 평양이다. 그는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상급교원(교수)으로 재직하다가 1994년 탈북 했다. 남한에 정착한 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과 통일부 통일교육원장을 지냈다. 지난해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4번을 받아 '탈북자 1호 국회의원'이 됐다.

그는 아버지가 북한에서 정무원 건설부장(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냈을 정도로 엘리트 집안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김일성 일가와 장·차관급 자제들만 다닌다는 평양 남산학교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생인 김평일과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북한 최고 명문인 김일성 종합대학교 자동조종학과를 졸업하고 준 박사 학위를 땄다. 북한의 학위는 3단계로 대학을 졸업하면 기사, 2년 과정을 추가로 마치면 준 박사, 3년 과정을 더 마치면 박사이다.

그가 탈북을 선택한 시기는 중국 난카이대학 교환교수 시절, 자유를 박탈한 북한 사회와 김정일 정권에 염증을 느껴 1994년 7월 월남했다.

남한으로 넘어온 뒤에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국내 최고의 대북전문가로 활동하며 북한의 움직임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과 전망을 내놓았다. 국내 최고의 북한 전문가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는 평양 신양리에서 태어났다. 한 전 총리의 부모 역시 평양이 고향이다. 부친은 당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했으며 모친은 평양 종합병원 수간호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6·25 전쟁 발발로 인해 한 전 총리의 부모도 평양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왔다. '한 달만 피해 있다가 돌아오면 평온해질 거다'라는 생각에 집문서며 값나가는 패물은 마당 한구석에 깊이 묻어두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평양에 돌아가지 못했다. 한 전 총리가 다섯 살 때 일이다.

한 전 총리는 6남매 중 맏딸로 자랐다. 부친의 사업실패와 빚보증으로 살림살이는 날로 쪼들려 갔고 어린 한 전 총리는 일 나간 부모님을 대신해 어린 동생들을 돌봤다.

탈북자 의원 1호 조명철 의원
평양서 태어난 한명숙 전 총리
탈북자 희망 김용 한아홈쇼핑 회장
갈 곳 없는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

이화여대 불문과, 대학원 여성학 석사를 수료하고 1967년 박성준 성공회대 NGO대학원 평화학 겸임교수와 결혼했으나 6개월 만이던 68년 남편이 유신정권에 의해 통일 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15년형을 받자 13년간 옥바라지를 했다.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던 한 전 총리는 7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2년간 투옥됐고 90년대에는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을 이끌었다.


9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해 초대 여성부 장관을 지냈고 참여정부에서는 환경부 장관과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에 임명됐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5만 달러를 수수한 혐의 및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로부터 9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혐의를 받아 검찰 조사를 받았다. 5만 달러를 수수한 혐의에 대해서는 지난 3월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으며 9억원에 대해서는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인천광역시 의회 노경수 전 의원은 황해북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금광을 운영해 노 전 의원은 풍족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부친은 부인과 노 전 의원을 포함한 3남2녀 형제들을 데리고 탈북했다.

그의 부친은 경북 김천에서 아연광을 발견해 광산업으로 큰돈을 만졌으나 사업에 실패해 인천 강화에서 인삼을 재배했다. 서울 광성고와 수원대 사회복지학과를 나온 노 전 의원은 2001년부터 2012년까지 인천 중구 시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하며 인천광역시의회 부의장, 민주평화통일회의 인천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인천 중구청장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풀리지 않는
실향의 아픔

북한 땅에 고향은 둔 기업인들에게도 명절은 유난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날이다. 직원들이 저마다 고향집을 찾아 떠나는 동안 쓸쓸히 사무실 한 귀퉁이를 지키며 고향에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개중에는 망향의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는 이들도 있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개발 등 대형 납북경협 사업을 이끌어낸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2007년 90세로 세상을 떠난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이 대표적이다. 함경남도 이원 출신으로 낙농업의 기틀을 다진 고 김복용 매일유업 전 회장도 2006년 별세했다.

정 명예회장은 강원도 통천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 가출, 상경해 사업에 뛰어들어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 냈다. 자신의 아호를 고향 마을인 '아산리'에서 따와 '아산'이라고 지었을 정도로 고향에 대해 각별한 정을 나카냈다.

1946년 월남한 김 전 회장은 71년 정부 투자기업 한국낙농가공을 인수해 매일유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뒤 낙농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대북 지원 단체를 통해 북한 어린이들에게 두유제품을 제공하는 등 고향에 대한 애정이 컸다.

귀순가수 1호
파란만장한 삶

귀순가수 1호이자 사업가 김용 한아홈쇼핑 회장의 고향은 자강도 강계군이다. "고향생각을 잊으려 명절 때면 외국에 나간다"는 김 회장은 베트남 최초의 홈쇼핑 방송국 HSV 오너다.


김 회장은 자강도 체육단 및 국가종합체육단 청소년조 빙상선수를 거쳐 평양국립교향악단 솔로가수가 되어 평양에 올라오면서 고향을 떠났다. 그는 91년 귀순했다. 스위스로 망명을 한 뒤 한국을 택했다. 일반적인 탈북자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을 통해 귀순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는 것을 감안할 때 북한 사회에서 꽤나 유복했던 가정에서 자랐음을 예상케 했다.

김 회장이 탈북하기 전 작고한 아버지는 당 간부였고 매형은 김일성 고급당학교 간부인 조직비서였다. 양봉이 300본 정도였고, 양도 50∼60마리 정도 키웠다. 북에서도 권력층만 타는 벤츠를 굴렸다.




김 회장은 스케이트 선수였다. 10년 터울의 친형과 함께 선수생활을 하다가 죽기 살기로 노래를 배워 평양국립교향악단 바리톤 솔로가수로 스카우트됐다. 그러나 3년 뒤 가수의 길을 버리고 중앙당 면접시험을 본 후 해외자금을 북한에 대는 중앙단 산하 105호실 책임지도원이 됐다. 그러던 그는 불현듯 공산주의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코에 머물다가 9개국을 거쳐 스위스에 도착해 망명했다. 현재까지 북한 국적의 사람이 여권을 갖고 귀순한 건 김 회장이 유일하다.

귀순 이후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가수로 왕성하게 방송 활동을 하며 사업으로 승승장구했지만 급격한 사업 실패와 이혼을 겪으며 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지난 2007년 자신이 운영하는 북한 음식 전문점 '모란각'을 재오픈해 식품유통 사업에 뛰어들었다. 국내 홈쇼핑 채널을 통해 소비자에게 직접 모란각 제품을 팔면서 자신감이 붙었고 당시 미국·캐나다·호주·일본 전지역에 모란각 제품을 유통했다. 그러다가 찾게 된 것이 베트남.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의 도움으로 2011년 HSV(베트남 홈쇼핑)의 새로운 주인이 됐다. 지난해에는 베트남 이웃 국가인 캄포디아에 진출해 HSC(캄보디아 홈쇼핑)을 설립했다. 캄보디아 첫 홈쇼핑 방송이다.

김 회장은 명절이면 한국에 없다. 대부분의 매스컴이 추석 기간 동안 고향 혹은 가족들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송하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수용소에서 명을 달리했다. 귀순을 택한 김 회장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김 회장은 상갓집 문상도 가지 못한다. 김 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임진각 실향민 합동차례에 몇 번 가봤는데 돌아올 때면 더 힘들어 요즘은 안 간다"며 "술 한 병 사들고 통일전망대에서 밤새 통곡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고향에 공장 지은 안유수 에이스침대 회장
납북 경협 공신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도 이북 출신이다. 1922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는 원산에서 다녔으나 다시 부친(고 박규회 샘표식품 창업주)의 전근으로 다시 함흥으로 이사 함흥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박 회장은 해방 직후 고향을 등졌다. 그가 24세 때인 1945년의 일이다. 단신으로 함흥을 떠나 철원에서 38선을 넘어 월남, 동두천에서 서울까지 철길을 따라 걸어왔다. 꼬박 1주일이 걸렸다고. 하지만 두 달 뒤 다시 월북, 먼저 부친을 설득해 단신 월남하게 하고, 이듬해 3월에는 6남매를 다 데리고 함께 월남했다. 반년 사이에 38선을 3번이나 오간 것.

올해 91세인 박 회장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왕성하고 정력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회사 경영은 97년 아들 박진선 사장에게 넘기고 물러났지만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한국식품공업협회장, 한국상장회사협의회 회장, 한국 중견기업연합회 명예회장이기도 하다. 북한과 관련된 사업은 추진하지 않았으나 이북5도 행정자문위원, 함경남도중앙도민회 고문 등의 역할을 맡는 등 꾸준한 관심을 보여 왔다.

90년대 초에는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 회장과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이사를 역임하여 고통받는 북한 아동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전개했으며 샘표식품에서도 매년 극빈자용 음식을 지원하는 푸드 뱅크에 1억원이 넘는 금액을 기부해 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7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향땅 한번 밟아보지 못했다. 지난 2000년 박 회장을 포함한 이북 출신 기업인들이 북한으로부터 정식 초청장을 받아 세부 계획까지 짰지만 북한 측의 급작스러운 변심으로 무산된 바 있다. 그가 명절에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남양주에 있는 선친 묘소가 전부다.

에이스침대 창업주 안유수 회장은 고향 땅에 공장까지 세웠다. 안 회장은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이다. 1951년 1·4후퇴 때 홀로 월남한 안 회장은 서울 노량진에서 침대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회사를 일구었다. 그는 1997년부터 사리원 일대에 도로정비와 민속거리 조성, 갈마국제호텔 가구공급 등을 펼쳐왔다. 2007년에는 침대공장 설립을 위한 첫 삽을 뜨기도 했다.

2008년 5월에는 58년 만에 처음 육로를 이용해 고향을 방문해 사리원의 예술극장에 의자를 공급하기도 했다. 안 회장은 개성공단에 입주하는 편한 길을 마다하고 고향에 공장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에이스 사리원 공장
경협 획기적 사례

자본금은 2000만달러(당시 환율 기준 180억원)로 에이스가 70%(130억원), 북한 광명성총회사가 30%를 출자했다. 공장은 총 대지면적 12만m², 건물면적 2만3200m² 규모이며 침대의 매트리스와 프레임을 생산한다.

이 사업은 국내 최초로 남북 간 육로를 통한 물자와 인원의 상시 왕래를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남북 경협의 획기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행했던 장치혁 전 고합 회장은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대북 사업에 깊숙이 관여해왔다. 평북 영변 출신의 장 회장은 고합그룹을 내세워 91년부터 대북 경협 활동을 해왔으며, 김영삼 정부 때의 금강산 유람선 사업과 김대중 정부 들어서의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001년 분식회계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경영뿐만 아니라 대북 활동까지 모두 접었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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