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한 해에만 3340명의 이주노동자가 죽었다(<이주노동자의 사망에 대한 원인 분석 및 지원체계 구축을 위한 연구>, 국가인권위원회). 이주노동자의 죽음은 그 어떤 죽음보다 빠르게 휘발된다. 사회적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한 탓이다. 김달성 목사가 그 죽음을 붙잡아 엮은 소설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

내 아들은 개가 아닙니다.
상생시. 일요일 오후에 시내에 나가 보면 이채롭다. 마치 동남아의 어느 도시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도시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낯선 말소리와 코끝을 찌르는 진한 향신료 냄새가 뒤섞여 공중에 떠다닌다.
평일 이곳의 새벽은 탄내 나는 안개와 함께 시작된다. 그것은 누군가의 꿈이 타버린 연기인지, 공장의 굴뚝에서 뿜어낸 독기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2020년 10월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많은 시민이 단풍놀이를 위해 산과 들로 나갔다. 하지만 시 외곽 변두리에 있는 ‘그린환경’의 풍경은 달랐다. 이 건축 폐기물 재활용 업체의 마당에는 대형 컨베이어벨트는 돌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아가리였다. 춤추는 검은 아가리였다.
돌과 시멘트 조각들이 계속 갈려 나갔다. 부서진 잔해들이 쉴 새 없이 밀려 나갔다. 대형 덤프트럭들은 가루가 된 것들을 연달아 실어 날랐다.
솜삭은 태국인이다. 그는 스무 살이 되기까지 영하로 내려가는 지역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입술이 파란 그가 쉼 없이 돌아가는 기계 앞에 서 있었다. 컨베이어벨트는 멈추지 않는 무한궤도처럼 육중한 진동을 일으키며 돌아갔다.
그는 취업 비자로 한국에 온 지 2년 반이 되었다. 그동안 지각이나 결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작업복 소매가 펄럭였다. 순식간이었다. 녹이 슨 기계 부품이 소매를 물었다. 기계는 멈추지 않았다. 팔이 빨려 들어갔다. 이어서 몸 전체도 휘말려 들어갔다.
비명은 짧았고, 기계음은 여전히 높았다. 근처에 있던 60대 한국인 노동자가 달려와 기계를 멈췄다. 이미 늦은 뒤였다. 벨트 위에는 붉은 폐기물들이 놓여 있었다.
비릿한 붉음이 시멘트 잔해물과 뒤섞였다. 119가 왔다. 사지가 찢긴 육신을 수습했다. 한 시간이 걸렸다. 시신은 인근 병원 냉동실에 안치되었다.
태국의 남부 ‘끄라비’의 농촌 마을. 전화벨이 울렸다. 솜삭의 비보였다. 어머니는 밭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비현실적이었다. 아들이 죽었다. 기계에 끼였다.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숨이 멎었다. 그대로 흙바닥에 쓰러졌다. 이웃들이 달려왔다. 어머니는 깨어나서도 헛것을 보았다. 막내아들 솜삭이 밥을 달라며 웃는 환영이었다.
아버지는 주저앉지 않았다. 예순여덟의 농부였다. 그는 평생 흙을 만졌다. 생명의 무게를 알았다. 그는 짐을 쌌다. 한국어는 전혀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88 서울올림픽과 K-팝 노래 하나뿐이었다. 선진국이라 믿었다. 잘사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비행기 표를 급히 구했다.
한국의 11월은 칼날 같았다. 아버지는 평생 영상 10도 이하 지역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는 점퍼를 입었지만, 떨리는 몸은 어쩔 수 없었다.
화장실에 자주 갔다. 거무스레한 안색을 가진 그의 눈매는 당나귀의 눈매를 닮았다. 아버지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아들을 보러 갔다. 병원 장례식장의 지하 냉동실에 아들이 있었다. 냉동실 관리자가 무표정하게 냉동실 문을 열고 서랍을 끌어당겼다.
그 속에는, 아버지가 평생 흙을 일궈 키워낸 귀한 생명의 형상은 없었다. 컨베이어 벨트의 무자비한 이빨에 갈려 나간 것은 아들의 근육과 뼈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끄라비의 뙤약볕 아래서 아들의 입에 넣어주었던 망고의 단맛이었고, 아이가 학교에 갈 때 매주었던 가방의 무게였으며, 가족의 내일을 위해 지탱해 온 한 세계의 파멸이었다.
아버지는 으깨진 살점 대신, 그 파괴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차가운 알루미늄 문에 손을 올렸다. 흙을 만지느라 거칠어진 농부의 손가락 끝에 전해지는 금속의 소름 끼치는 냉기는 아들이 마지막으로 느꼈을 기계의 온도였다.
아버지는 차마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대신 그 차가운 문 표면의 결을 따라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마치 그것이 아들의 꺾인 등줄기라도 되는 듯, 아버지는 생전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매끄럽고 비인간적인 촉감을 마른 손바닥으로 오래도록 받아내고 있었다.
이튿날 공장을 찾아갔다. 사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공장장만 머리를 긁적였다.
“거, 운이 없었네요. 빨리 화장합시다.”
공장장의 말은 가벼웠다. 키가 큰 그는 상생시 건설노조 부위원장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고시원 쪽방에서 밤을 보냈다. 난방이 되었지만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11월 말, 부사장을 만났다. 그는 뒷짐을 지고 말을 뱉었다.
“삼천만 원 줄 테니 화장부터 하세요. 그게 서로 편해요.”
통역사가 말을 전했다.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3천만 원. 순간 계산을 했다. 짊어지고 있는 빚, 남은 자식들, 병든 아내의 얼굴이 숫자처럼 떠올랐다. 봉투가 손에 닿아 있었다. 그는 봉투를 밀어냈다.
나흘 뒤 부친은 이주노동자센터를 찾아갔다. 통역사의 소개로 찾아간 센터에서 감청색 헌팅캡을 쓴 김 아모스 목사를 만났다. 그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한주 뒤 김 목사는 ‘솜삭 산재사망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시민들이 하나둘 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장이 나타났다. 사장실에서 면담을 했다. 키가 작고 머리를 짧게 깎은 사장의 거동은 마치 치타 같았다. 그가 검은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번들거리는 눈으로 아버지를 훑었다. 그는 봉투를 내밀었다. 변화 없는 액수였다.
“화장을 빨리하세요. 태국에서는 큰돈 아닙니까?”
사장은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라, 통역사의 얼굴만 보았다. 그는 번들거리는 눈알을 굴리며 이런 말도 내뱉었다.
“태국에도 이주 노동하는 사람들이 꽤 많더군요. 태국보다 더 못 사는 나라 사람들이 태국으로 건너가 일하다 죽는 경우가 적지 않고. 얘기 들어보니까 보상 같은 거 한 푼도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고, 시신 수습도 제대로 안 되는 곳이 태반이라면서요? 그런 거 생각하면, 우리가 제시한 금액은 결코 작은 게 아닙니다. 태국 물가로 환산하면 더 그렇고요. 보세요, 한국도 옛날에 못사는 나라였을 때, 다른 나라로 가서 피눈물 흘리며 일했어요. 타국에서 많이 다치고 죽기도 했죠. 하지만 그 희생이 밑거름이 되어 지금의 코리아가 있는 겁니다. 세상에 공짜 선진국은 없어요.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올라가는 길목엔 항상 이런 통과 의례가 있는 법입니다. 동남아 사람들은 한국이 무슨 부자 나라인 줄 아는데, 우리도 사실 위아래로 꽉 끼어서 숨도 못 쉬는 처지예요. 위로는 자본과 기술을 앞세운 초강대국들이 짓누르고, 아래로는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국가들이 우리 턱밑까지 쫓아옵니다.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게 원래 이런 거예요.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되는 겁니다. 한 발자국만 삐끗해도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무한 경쟁 시스템이죠. 겉으로야 K-팝이니 K-드라마니 하며 화려하게 번쩍거리지만, 이 나라 경제를 떠받드는 우리 같은 중소기업들은 매일매일이 전쟁입니다. 우리도 살아야 외국인노동자들도 돈 벌어갈 거 아닙니까? 그러니 너무 감정적으로 나오지 마세요. 이게 다 지독한 글로벌 먹이사슬의 생리니까요.”
사장이 이상한 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자, 통역자가 말을 옮기다 말았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의 도리만큼은 분명히 알았다. 그는 사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 아들은 개가 아닙니다!”
말은 짧고 강렬했다. 젊은 통역사가 말을 또렷하게 전했다. 사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것은 평생 땅과 하늘을 믿고 살아온 농부의 존엄이었다.
대책위는 공론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한 주 뒤 공장 앞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아버지는 마이크 앞에 섰다.
“내 아들은 돈을 벌러 왔습니다.”
울먹이는 그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그러자 김 목사와 대책위원들이 구호를 크게 외쳤다. 사측의 만행을 규탄했다.
경찰이 1차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2인 1조 원칙 위반. 기본적인 안전시설조차 부재. 안전관리자 없었음. 모든 것이 비용 절감 때문이었다.
2차 기자회견은 고용노동부 상생시 지청 앞에서 열렸다. 지청장은 바쁘다는 핑계로 면담을 거절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시간은 얼어있었으나 도시의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다. 성탄절이 다가왔다. 도심지는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했다.
대형 백화점 앞 광장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높이 세워졌다. 수백 개 전등이 돌아가며 깜박거렸다. 케이 팝이 울려 퍼졌다. 캐럴 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 장례식장 지하 냉동고는 여전히 차가웠다. 솜삭이 안치된 지 50일이 지났다.
김 목사가 기도회를 열었다. 그 장례식장 지하에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주노동자와 교인들과 시민들이었다.
“지극히 작은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40절, 성경 구절이 낭독되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극히 작은 사람들과 동일시했다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다. 아버지는 그 불빛 속에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참석자들이 모은 헌금이 부친에게 전달되었다.
12월 30일이었다. 아버지와 대책위원들이 서울 광화문에 있는 천막 분향소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한국인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의 아들도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목숨을 잃었다. 석탄발전소에 고용된 비정규직 청년노동자였다. 태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가 만났다. 두 사람은 말없이 손을 잡았다. 슬픔의 언어는 같았다.
“위험의 외주화를 멈춰라. 죽음의 이주화를 멈춰라!”
그들의 외침은 광장의 소음에 아주 묻히지는 않았다.
해가 바뀌었다. 1월 초, 여론이 악화되자 사장이 대책위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눈빛은 차가웠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기록되었다. 협상이 진행되었다. 재발 방지 대책이 세워졌다. 안전 관리사를 채용하고 안전시설을 보강했다. 배상액은 1억 5천만 원으로 합의되었다. 그제야 아버지는 아들이 최소한의 인간 대접을 받았다고 느꼈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추도식이 열렸다. 소박했다. 솜삭의 유골함 앞에 향이 피어올랐다. 아버지는 참석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갑니다.”
마지막으로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 히무가 단상에 올랐다. 그는 솜삭의 친구였다.
추도사
친구 솜삭에게.
솜삭, 너는 항상 웃었다.
너의 이름은 태국말로 ‘존엄’이라 했지.
너는 3년만 일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너는 차가운 기계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 나라의 건물을 세우고 쓰레기를 치우지만, 세상은 우리 이름을
똑바로 불러 주지 않는다.
우리는 돈을 벌러 왔지, 죽으러 오지는 않았다.
솜삭, 네 아버지가 외쳤다.
너는 개가 아니라고.
그 외침이 우리 가슴에 박혔다.
이제 검은 기계가 멈춘 곳에서, 더 이상 비명이 없는 곳에서
편히 쉬어라.
너의 아버지가 세운 그 존엄을 우리는 잊지 않겠다.
잘 가라, 솜삭. 우리의 형제여.
아버지는 유골함을 품에 안았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안듯 조심스러웠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창 밖으로 얼음 같은 겨울 산이 지나갔다. 회색 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이어졌다. 단풍은 이미 지고 없었다. 아버지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생각에 잠겼다. 비행기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가슴 속 아들에게 속삭였다. 이제 따뜻한 집으로 가자. 끄라비로 가자.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떠올랐다. 마침내 얼음 같은 땅을 뒤로 하고 상공으로 솟구쳤다. 창 아래 펼쳐진 도시의 야경은 지독히도 환했다. 그 빛들은 마치 거대한 불바다처럼 일렁였다.
[김달성 목사는?]
1955년생으로 충북 청주에서 성장했다. 감리교신학대학과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1980년대 10년간 서울과 인천에서 도시 빈민 선교와 노동 선교 활동을 했다. 2018년부터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로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2026년 <황해문화> 봄호에 연작소설 <안개 낀 상생시> 가운데 한 편인 <얼지 않는 소카>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저서로 <옆구리 뚫린 아담의 기쁨> <파랑 검정 빨강> <얼어붙은 속헹> <이주노동자가 오는 것은> 등이 있다.
<기사 속 기사> 김달성 목사 인터뷰
관찰 아닌 체험 담은 ‘증언 문학’
김달성 목사는 지난해 <안개 낀 상생시>라는 제목의 연작소설을 썼다. <내 아들은 개가 아닙니다>는 8편의 연작소설 중 한 편으로 2019년 10월 경기도 양주에서 태국인 이주노동자 프레용 자이븐씨가 작업 중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사망한 사고를 소재로 했다.
김 목사는 자신의 연작소설을 ‘증언 문학’이라고 표현했다. 옆에서 관찰하거나 취재를 통해 사건의 정황을 습득한 게 아니라 당사자에 준하는 체험을 통해 얻은 내용에 문학적 색을 입힌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산업재해로 사망해 더 이상 증언할 수 없는 희생자를 대신해 사건을 증언했다는 중의적 의미도 담겼다.
다음은 김 목사와의 일문일답.
8편의 연작소설
2019년 사건 소재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지난 9년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며 팩트에 기반한 보고서 형태의 글을 주로 썼는데 항상 아쉬움이 있었다. 내가 만난 이주노동자들의 입체적인 삶을 담고 싶다는 갈증이 늘 존재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150만 이주노동자가 이루고 사는 숲을 그리고자 했다. 지난해 내내 글을 쓰느라 현재 탈진 상태다.
▲소설을 ‘증언 문학’이라고 칭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김 아모스 목사’는 희생자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모든 상황을 함께 겪는 인물이다. 희생자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고 같이 대응하면서 그들의 가족이 서툰 언어로 말하는 억울함을 증언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의 페르소나인 김 아모스 목사를 통해 강한 리얼리티와 깊은 영성적 요소가 융합된 영성적 사회리얼리즘 소설을 쓰고자 했다.
▲그동안 이주노동자의 죽음을 숱하게 봤을 텐데, ‘양주 컨베이어 벨트 사건’을 소재로 삼은 이유가 있다면?
-태국에서 농사를 짓던 희생자의 아버지가 아들의 시신을 데리러 와서 업체 사장과 대면했다. 사측은 ‘3000만원을 줄 테니 빨리 화장해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 말을 듣던 희생자의 아버지가 태국어로 “내 아들은 개가 아닙니다!”라고 딱 한 마디 했다. 통역사가 그 말을 통역하는데 주변이 조용해지더라. 그 말이 지금까지 내 뇌리에 딱 박혀있다. <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