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김준혁 기자 = “오늘 한 손님이 종량제 봉투를 10만원어치 사가기도 했고, 재고가 동난 규격도 있어요.”
24일, 서울 서초구의 한 편의점 직원의 업계 현장 분위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중동발 전쟁으로 비닐류 원료 수급 불안이 거론되면서 ‘종량제 봉투 대란’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다만 이런 자극적인 표현이 되레 불안 심리만 부추기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날 서울 종로구 방산종합시장에서 전문 포장비닐 업체를 운영 중이라는 A씨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아직 종량제 봉투 대란이 발생할 단계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중동 분쟁으로 비닐류 관련 원료 가격이 50% 정도 오른 데다 물량 확보도 어려워져, 국내 석유화학 대기업 중 1곳에서 생산을 일시 중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도 “현재는 식품 포장재, 플라스틱 용기 등 일반 산업용·상업용 제품 쪽에서 먼저 문제가 나타나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이어 “종량제 봉투는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품목이라, 가격 변동에도 비교적 공급이 안정적인 편”이라며 “원료를 받아 2차·3차 가공을 하는 민간업체들은 가격 부담과 공급 부족으로 생산 자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부연했다.
수급 부족 장기화에 대해선 “업체들이 재고를 풀더라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이대로 분쟁이 계속될 경우 종량제 봉투 수급에도 차질이 생길 가능성은 있다”고 내다봤다.
이날 경기도 용인시 소재의 한 비닐 제조업체 B사 역시 “원료 공급이 중단되지는 않았고 재고도 남아있다”면서도 “최근 단가가 오르는 추세라 새 제품을 제조하기는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하소연했다.
앞서 지난 23일 다수 언론에선 ‘쓰레기 봉투 대란’ ‘비닐 대란’ 등 제목으로 잇따라 보도했다. 매체들은 원인으로는 중동 분쟁 장기화에 따른 나프타(납사) 수급 불안을 꼽았다.
나프타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얻는 석유화학 기초원료로, 여러 화학 공정을 거쳐 비닐과 플라스틱 용기, 전선 피복, 의류용 섬유, 페인트 등에 쓰이는 소재로 활용된다.
온라인 종량제 봉투 판매 사이트 ‘종량제닷컴’도 “최근 국제 정세 영향으로 봉투 제작부터 수급 및 입고 일정이 원활하지 못하다”며 “전 지점에서 품절 또는 출고 지연이 발생되는 점 양해 부탁드린다”고 공지했다.
해당 사실이 알려지자 소셜미디어(SNS)에선 종량제 봉투를 미리 확보했다는 이른바 ‘사재기 인증’ 게시글도 올라왔다. 이에 누리꾼들 사이에선 “이제 쓰레기 봉투도 오픈런 해야 하나” “우리 동네는 1인당 3장으로 제한하고 있다” “지역민들이 나눠 쓰는 건데 사재기라니 이기적이다”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이 같은 상황에 정부도 나프타 수급 불안에 대응해 수출 제한 등 관련 조치 검토에 나섰다.
양기욱 산업통상부 산업자원안보실장은 정부세종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나프타의 생산·도입 물량을 의무적으로 보고받을 예정”이라며 “향후 매점매석 금지와 수출 제한 조치 등을 실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국내에서 생산된 나프타의 수출 물량을 내수로 돌려 수급난에 대비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국가통계포털(KOSIS) 광업제조업 동향조사에 따르면, 지난 1월 기준 나프타 출하량은 172만kL, 이 가운데 수출량은 50만kL 수준이다.
양 실장은 “개별 업체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재고는 2∼3주 정도 확보하고 있다”며 “수급 애로는 석유화학 업계와 논의해 풀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전날 일부 석유화학 공장의 가동이 중단된 데 대해선 “여천NCC에서 가동을 중단한 시설은 14만톤(t) 규모로 공급에 큰 이슈가 없는 수준”이라며 “LG화학의 80만톤(t) 규모의 가동 조정도 정부가 미리 파악하고 있던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중동 리스크 영향과 관련해선 “조선업계 에틸렌가스 수급 문제에 이어 세탁기 등 대형 가전의 내·외자재를 구성하는 석유화학 기반 소재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우려된다”며 “매점매석, 가격 담합, 정량 미달, 재고량과 상관없는 가격 인상 등을 집중적으로 점검하는 한편, 가격이 높은 주유소 명단도 계속 공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번 주 안에 관련 조치를 시행하는 것을 목표로 관계 부처와 협의를 진행 중이다.
업계에선 중동 분쟁이 장기화될 경우 그 여파가 비닐 등 생활 밀착형 품목으로까지 번질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 가격 상승세도 뚜렷하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 오피넷에 따르면, 나프타 가격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공격 직전인 지난달 27일 배럴당 68.87달러에서 전날 138.75달러로 두 배 이상 뛰었다.
한국신용평가도 지난 18일 중동 분쟁 관련 보고서에서 원유는 국가의 전략적인 비축 대상 자원으로 대응 여력이 있는 반면, 나프타는 ‘석유화학 원료’로 별도 구분돼 사실상 100% 민간업체 재고에 의존하는 구조라고 분석한 바 있다.
다만 일각에선 일부 출고 지연 등 사례만으로 전면적인 ‘대란’을 말하긴 이르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자극적인 언론 보도를 접한 시민들의 불안감이 커지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되레 품절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24일 오전에는 한 경기도 지역의 한 온라인 맘카페에 ‘쓰레기봉투 대란 인터넷 기사를 보면서…’라는 제목의 글이 게재됐다.
해당 회원은 “어제 오후 일부 인터넷 기사에 쓰레기봉투 대란 글을 보면서 쓰레기봉투도 못 사는 거 아닌가 해서 애들 학원 근처 편의점에서 구입했는데 평소처럼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고 적었다. 이어 “가게 사장님도 여유 있고 오더가 안 되거나 그런 얘기는 아직 못 들었다고 하시더라”며 ‘쓰레기봉투 대란’ 보도를 의아해했다.
“오늘(지난 23일) 유달리 쓰레기봉투가 많이 나갔고, ‘대란’ 같은 애기들을 많이 하시는데 전혀 들은 바 없다고 하셨다”는 그는 “이렇게 쉽게 구입할 수 있는데 왜 저런 기사를 내보냈을까요? 지금 막 부족해서 사재기가 시작됐다는 식의 기사를 꼭 써야만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해서 구매를 더 부추기는 기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때일수록 영향력을 가진 기자들이라면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기사를 팩트대로 써야 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씁쓸했다”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재경 소재의 언론정보학과 교수도 “‘쓰레기봉투 대란’ 같은 표현은 실제 상황보다 훨씬 큰 혼란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전형적인 ‘언론 프레임’”이라며 “이런 보도 방식에는 시민들이 실제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결과적으로 불필요한 사재기, 줄서기 등의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표적으로 코로나19 때 마스크 대란이 발생하지 않았었나? 과도한 보도가 수요 폭증을 일으켰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종량제봉투 문제는 특정 물품의 가격 인상이나 물류 지연 등의 지엽적인 문제로 발생하는데 이런 상황을 마치 ‘전국적인 위기’처럼 확대 재생산해서는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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