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헬리콥터 편대가 사라져 보이지 않는데도 군용차량 행렬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훈련중인가, 혹은 부대가 어디로 이동하는 걸까? 설마 무슨 폭동이나 데모를 진압하러 출동 중인 건 아닐 테고…….’
홍조 같은 애달픔
청운은 생각에 잠겼다. 장갑차 안에서 껌을 찍찍 씹어대던 흑인 병사가 청운을 향해 씩 웃었다.
큰 눈과 하얀 치아가 일면 선량해 보이고 그네들의 조상이 노예로 핍박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동정심도 들었으나, 다른 한편으론 이 작은 땅에서 그들이 백인들과 더불어 저지르고 있는 숱한 범죄와 죄악을 들은 적이 있기에 청운은 미소로 답례를 할 수가 없었다.
청운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바라보는 사이 그 흑인 병사는 장갑차와 탱크를 탄 채 다른 여러 흑인과 백인들과 뒤섞이며 청운의 망막 위를 스쳐갔다.
한동안 이리저리 발길 가는 대로 떠돌던 청운은 마침내 한길을 멀리 벗어나 어느 느티나무 아래 서 있었다.
서산마루에 걸린 노을이 피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속엔 사랑한 소녀의 볼에 물든 홍조 같은 애달픔도 스민 듯싶었다.
나무 밑에 놓인 평상에 걸터앉은 청운은 가게 할머니에게 맥주 한 병을 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마시면서 노을빛을 쳐다보았다.
‘빨간색이든 검정색이든 하얀색이든 자연에서는 저마다 아름다운데, 일단 사람 속에 들어가 빛을 발하면 왜 그렇게 추악해질까? 백인, 흑인, 적색인, 황색인…… 참 가관이야!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고 잡아먹는 꼴을 기록영화로 만들어 짐승들한테 보여 주면 아마 기겁해서 고개를 돌리지 않을까?’
청운은 맥주 값을 치르고 나서, 약도를 꺼내 할머니에게 보여 주며 길을 물었다.
“뭐여, 연꽃 웅덩이를 찾는가 보네임. 젊은 총각이 뭣이 아쉬워 그 늪 속엘 들어갈라는가잉.”
얼굴에 진 주름살이 낡은 나무 문살같이 잿빛으로 변한 할머니가 눈을 크게 떴다.
“친구 보러 가요.”
“응, 그런가. 아무튼 거꾸로 왔구먼. 뻐스는 없응게 택시를 타야 혀.”
“걸어가려고 하는데 너무 뭔가요?”
“가만 있자, 그라면 저짝으로 쭉 걸어 읍내로 다시 나가서 보산리로 들어가라구.”
백인, 흑인, 적인, 황인 행렬
한복 차림으로 혼자 걷는 여자
청운은 인사를 하곤 허적허적 걸었다. 하지만 왔던 길을 되짚긴 싫어서 주로 샛길을 골라 더듬었다.
‘너무 여유를 부리다 보니 이번엔 삼천포로 빠졌군.’
땅거미가 내리는 것을 보며 청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읍내에 도착하니 아까는 텅 빈듯했던 거리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활보하고 있었다.
아까 군용차량 행렬에서 보았던 백인과 흑인들이 예쁘고 아담한 아가씨의 어깨를 감싼 채 활기차게 걸으며 과도한 명랑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진한 화장을 한 잘난이 못난이 인형 같은 아가씨들은 작은 키로 폴짝 뛰어 거인의 어깨에 매달려 깔깔거렸다.
마침 한복 차림에 혼자 걷는 여자를 본 청운은 약도를 꺼내 방향을 물었다.
“여긴 본래 유서 깊은 고장이에요. 코쟁이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정겨운 고향 마을이었단 말이죠. 아시겠어요? 초행 길이신가 본데, 여긴 읍내고…… 그런 미군부대 클럽은 더 가야만 해요.”
“아 네, 그렇군요.”
“그래요.”
“그럼 어떻게 가야………?”
“음, 택시를 타면 아주 빠르죠. 하긴 뭐 30분쯤만 걸으면 보산리라는 마을이 나오니까, 거기 가서 물어 보면 되겠죠, 저쪽 길로…….”
“네, 감사합니다.”
청운은 공손히 인사하고 나서 고개를 들었으나 그녀는 이미 반대쪽으로 나비처럼 하늘하늘 우아하게 걸어가는 것이었다.
길은 좀 좁아졌긴 해도 아스팔트로 포장돼 있었다. 청운은 절뚝절뚝 발을 옮겼다.
길 건너 저 멀리 벼 그루터기만 남은 논이 보이고, 비탈진 야산 기슭엔 아기자기한 밭고랑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그리고 헐벗은 겨울나무 사이로 초가집 몇 채가 살짝 가려져 있었고, 보이지 않는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파르무레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까 그 한복 차림을 한 여인의 인상이 뇌리에 남아 이채로우면서도 어쩐지 문득 애잔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청운은 길동무 삼아 옛노래 한 곡조를 흥얼거렸다.
유서 깊은 고장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