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강자는 왜 ‘올 어게인’ 받지 못하나

2025.12.16 08:40:39 호수 0호

JTBC <싱어게인4>를 보다가 흥미로운 장면을 몇 번 목격했다. 실력이 비슷한 두 가수가 대결하면, 약간 더 잘한 가수에게 표가 몰리며 8개 ‘어게인’, 즉 올 어게인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순간 역설이 시작된다. 누가 들어도 월등하다고 느끼는 가수가 오히려 올 어게인을 받지 못하고, 6:2나 7:1 같은 절묘한 스코어로 이기거나 심지어는 3:5로 지는 상황이 펼쳐진다. 겉으로는 공정한 경쟁의 장인데, 실제 표 흐름은 전혀 다른 원리로 움직이는 셈이다.

심사위원들의 마음속에서는 아마 ‘어차피 저 사람은 올라갈 텐데, 나라도 덜 유리한 사람에게 표를 줘야지’라는 독백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조용한 마음의 계산 하나가 승부를 바꾸고, 강자의 정당한 우위를 희미하게 만든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언더독 효과(Underdog Effect)’라고 부른다. 경쟁에서 약자에게 동정과 기대를 담은 지지가 몰리는 현상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약자를 응원한다. 승리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사람에게 투표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더 따뜻하고, 정의로운 일처럼 느껴진다.

강자에게 표를 주는 것은 마치 ‘이미 충분한 사람을 더 키워주는 일’처럼 느껴져 마음이 편치 않다. 심사위원은 자신도 모르게 약자에게 한 표를 얹어주며 일종의 ‘심리적 균형’을 맞추고 있다고 믿는다. 이때 공정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균형’을 맞추는 문제로 변질된다.

이런 심리는 오디션 무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판에서 아주 빈번하게 나타난다. 여론조사에서 1위 후보가 지나치게 앞서가면 유권자 일부는 갑자기 약자 후보로 이동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너무 한쪽이 압도하는 건 불편하다. 균형이 필요하다.”


지지율 추이가 흔들리고, 선거 막판 여론이 뒤집히는 데는 이 심리적 보정이 숨어 있다.

선거는 실력과 정책의 대결이 아니라, 어쩌면 유권자들의 ‘공정성 환상’을 달래는 선택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역설적 투표(paradoxical voting)’라고 부르며, 강자가 너무 잘 나갈 때 약자에게 동정표가 몰리는 현상으로 기록한다. 민주주의조차 감정 편향의 흐름에서 예외가 아닌 셈이다.

기업 인사 평가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벌어진다. A라는 직원이 확실한 성과로 두각을 드러내면, 평가자들은 마음속에서 ‘A는 이미 다 인정하는 사람이고, 내가 조금 낮게 줘도 손해 보지 않는다. B는 그래도 내가 도와줘야 한다’는 묘한 거리감을 느낀다.  

이렇게 ‘균형을 위한 따뜻한 점수’가 더해지면 정작 뛰어난 인재는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

회사는 점점 ‘성과가 좋아도 안전하지 않은 구조’로 변하고, 리스크를 감수하고 도전하는 문화는 약해진다. 공정은 사라지고, 심리적 보상심리만 남는다. 겉으로는 평평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왜곡된 구조가 형성된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 ‘공정’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나라다. 그러나 그 공정이 ‘기준의 일관성’이 아니라 ‘결과의 균형’을 의미하는 순간, 공정의 본질은 사라진다. 공정은 원래 실력이 있으면 실력대로 평가받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공정은 때때로 ‘결과의 균형’으로 변형된다.

강자의 승리가 너무 당연해 보이면, 사람들은 그 당연함을 불편해한다. 당연한 승리가 주는 갑갑함을 해소하기 위해 약자에게 표를 몰아주는 것이다. 이 본능이 반복되면, 사회의 메시지는 ‘너무 잘하면 곤란하다. 너무 뛰어나면 견제가 들어온다’는 역설적 시그널로 흘러간다.

이렇게 되면 실력주의는 무너지고, 감정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문제는 이런 감정적 공정이 결국 더 큰 불공정을 부른다는 점이다. <싱어게인>에서 강자가 올 어게인을 받지 못하는 순간은 겉으로 보기엔 따뜻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실력이 왜곡된 장면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정치에서 약자에게 몰린 동정표는 정책 경쟁을 흐리고, 기업에서의 심리적 균형 맞추기는 진짜 인재를 가려내는 데 실패한다. 대학 입시, 조직 평가, 채용에서도 이 ‘심리적 균형’이 개입하는 순간 기준은 흐려지고, 제도는 ‘누구에게도 명확하지 않은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공정은 이름만 남고 기능은 사라진다.

우리가 지켜야 할 공정의 본질은 감정적 균형이 아니다. 기준의 흔들림 없는 일관성이다. 잘한 사람은 잘했다고 말할 수 있고, 부족한 사람은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 실력의 차이를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는 사회. 그 사회에서만 진짜 공정이 작동한다.

언더독에게 동정을 주는 마음은 인간적일 수 있지만, 그 마음이 공정을 대체하는 순간 사회는 혁신의 속도를 잃는다. 진짜 공정은 누군가를 돕는 마음이 아니라, 누군가를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싱어게인>의 한 표 흐름을 보며 필자는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지금 실력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마음속 불편함을 덜어내기 위해 ‘균형’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강자가 스스로 얻어야 할 올 어게인을 빼앗기는 순간, 사회도 누군가의 정당한 성취를 빼앗고 있을지 모른다.

공정은 심리적 어게인이 아니라, 실력의 어게인에서 시작된다. 한국 사회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면, 감정의 균형이 아닌 기준의 명확함을 선택해야 한다.

내년 6·3 지방선거 역시 이 심리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여론의 높낮이는 하루가 다르게 요동치고, 강자의 우위는 언제든 ‘불편한 당연함’으로 받아들여져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유권자가 약자에게 표를 몰아주고 싶어지는 것은 인간적 본능이지만, 선거는 결국 도시의 미래와 지역의 삶을 결정하는 행위다.

감정적 균형이 아닌 정책적 실력, 동정의 어게인이 아닌 능력의 어게인이 기준이 돼야 한다. 누가 더 일을 잘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지역을 바꿀 수 있는지, 누가 더 책임을 질 수 있는지. 그 단단한 기준이 흔들릴 때 정치의 결과는 예능 무대의 판정보다 훨씬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지방선거는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택이다. 따뜻한 마음보다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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