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나이보다 관심이 기억을 지킨다

2025.12.10 09:07:00 호수 0호

지난 9일, 고등학교 동기들과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작은 횟집에서 송년회를 가졌다. 세월은 누구 하나 비켜가지 않았다. 한때 각이 살아 있던 얼굴의 선들은 둥글어졌고, 철문처럼 단단하던 어깨는 세월의 무게만큼 가벼워져 있었다. 대부분 은퇴했고, 삶의 속도도 예전보다 한참 느려져 있었다.



그런데 속도만 느려진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바라보는 세상의 폭과 깊이도 함께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메뉴를 고르고 술잔을 맞부딪히는 동안 대화는 결국 한 지점으로 모였다. “요즘 기억력이 너무 떨어진 것 같지 않냐”는 자조 섞인 말이었다.

농담처럼 시작된 말이었지만, 결국 모두가 자신을 향한 진단으로 받아들였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기억력이 약해진 게 아니라, 관심이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웃음이 터졌지만, 금세 조용한 동의가 흘렀다.

예전에는 몸이 피곤해도 새로운 기술과 사회 문제를 이해하려고 애썼고, 조직에서 벌어지는 변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긴장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은퇴와 함께 일상이 안정되는 순간, ‘알아야 할 이유’가 줄어들자 자연스럽게 세상과의 연결도 느슨해졌다.

관심이 사라지니 기억도 함께 빠져나간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결국 기억은 나이와 싸우는 기능이 아니라 관심과 함께 유지되는 삶의 태도에 가깝다는 사실이자, 우리 모두가 애써 외면해온 현실이었다.

그날 모임에서 가장 강렬했던 장면은 천안에서 가축 손해사정인으로 일하고 있는 친구였다. 그는 50년 전 교복 시절의 얼굴은 물론, 군 전역 직후의 모습, 사회 초년생 시절의 표정까지 정확하게 떠올리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왜 그럴까? 특별한 기억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도 수십 종의 가축과 질병, 보험 약관, 배상 기준을 매일같이 외워야 하는 직업을 가졌다. 그의 기억력이 유지되는 비결은 단순했다. 여전히 ‘배워야 하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관심이 그의 뇌와 감각을 단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이 문제는 노년층만의 개인적 현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 전체가 겪고 있는 구조적 위기라는 점이다. 뉴스는 하루에도 수백 건씩 쏟아지지만, 사람들은 그중 무엇 하나 깊게 들여다보지 않는다.

소셜미디어는 수천 개의 자극을 던지지만, 다음 날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다.

국가적 현안조차 며칠만 지나면 여론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언론도 오래 붙잡아두지 못하며, 국회조차 지속적 관심을 요구하는 의제보다 즉각적 효과를 노린 이슈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우리는 이미 ‘주의력 파산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단순한 노화가 아니다. 이것은 국가의 의사결정 능력이 약화되는 징후며, 민주주의의 지속성을 위협하는 구조적 경고음이다.

관심이 사라진 문제는 정책에서 지워지고, 정책에서 지워진 문제는 현실에서 해결될 기회를 잃는다. 그래서 부동산, 저출생, 연금개혁, 지역 격차, 교육 불평등, 재난 안전망 같은 장기 국가 의제는 늘 “논의 중”이라는 말만 남긴 채 흐려지고, 다음 이슈에 밀려나버린다.

사회 전체가 한 달짜리 기억력으로 움직이는 셈이다.

관심이라는 에너지가 축소되면, 사회 전체가 필연적으로 단기 사고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나이가 들어 잊어버린다”고 스스로를 탓하며, 사회가 빠르게 망각하는 현상 역시 개인의 문제로 돌린다. 그러나 진실은 훨씬 더 단순하고도 뼈아프다.


세대 전체가 관심을 잃고 있다. 관심을 유지하는 것이 부담이 되고, 생각하는 것이 피곤해지는 사회로 변해버렸다.

사실 이번 사당동 동창 모임은 그래서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잃어가고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았다. 문제는 ‘기억’이 아니라 ‘관심’이며, ‘나이’가 아니라 ‘삶의 밀도’ 또는 ‘뇌의 능력’이 아니라 ‘집중력’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했다.

관심이 살아 있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선명하고, 관심을 잃은 사람은 젊어도 흐릿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는 점점 후자로 기울고 있다.

기억을 되살리는 방법은 특별하지 않다. 약도 필요 없고, 훈련도 필요 없다. 다시 관심을 갖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고, 작은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생각하는 일이다.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국정 운영에도 모두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관심이 떠나면 기억도 떠나고, 기억이 사라지면 문제 해결의 의지 또한 사라진다. 문제를 해결할 힘의 원천은 결국 관심이다.

사당동의 소박한 동창회가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깊었다. “우리가 늙은 게 아니라, 우리가 덜 관심을 들인 것뿐이다.” 문제는 기억이 아닌 관심이며, 관심은 언제든 다시 켤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능력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 잃어가고 있는 것은 기억력이 아니라 생각하려는 마음, 즉 관심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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