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AI 시대의 진실과 해답은 현장에 있다

2025.10.30 10:03:06 호수 0호

글을 쓰는 일은 종종 책상 위에서 세상을 재단하는 일과 닮아 있다. 작가의 의도와 지식, 그리고 모니터 속 자료와 키보드만으로 완성되는 문장은 깔끔하다. 그러나 현실의 분위기는 빠져 있다.



필자는 새벽에 칼럼을 쓰고 원고를 핸드폰으로 옮긴 후, 퇴고는 일부러 전철이나 커피숍에서 한다. 사람 속, 소음 속, 그리고 광고판과 스마트폰 화면 사이에서 읽으면 문장이 달리 보인다.

책상 위에선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문장이 대중 속에선 낯설게 보이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그때 비로소 독자의 언어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결국 공간의 언어를 통과해야 생명력이 살아난다. 책상 위의 문장은 논리의 산물이고, 거리 위의 문장은 체감의 산물이다. 후자가 훨씬 더 감동적이고 진실에 가깝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는 현장에 가야 한다. 회의실이나 SNS 정보만으론 민심을 읽을 수 없다.

요즘 정치인들은 현장을 말하지만, 실제는 현장감이 부족하다. 현장은 발로 밟아야 한다. 냄새를 맡고, 눈빛을 보고, 소리를 들어야 한다. 책상 위의 데이터가 아무리 정교해도 시장에서 만난 상인의 한숨 한번이 더 정확한 현실을 알려준다. 그 한숨이 정책의 첫 문장이 되고 핵심이 돼야 한다.


기업도 현장을 모르면 실패 확률이 높아진다. CJ그룹은 이를 잘 안다. 그래서 신입사원에게 입사 후 첫 2년을 현장에서 보내게 한다. 현장 분위기를 알아야 일의 본질을 이해하고, 실패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 경험과 함께 시간 경험도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의 정치와 언론은 현장뿐 아니라, 시간에서도 멀어져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느림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겪어내는 시간이다.

같은 장소를 하루 동안, 혹은 한 달 동안 다시 방문해 보면 보이지 않던 맥락이 보인다. 지속된 관찰이야말로 가장 깊은 통찰을 낳는다.

세미나나 토론회 등에 직접 참여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자료로만 읽는 것과 현장에서 듣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 자리의 공기, 사람들의 표정, 말의 호흡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문장으로 옮길 수 없는 정보다. 경험의 결이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사이버 시대라는 이름 아래 공간과 시간의 경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회의는 화상으로, 취재는 메신저로, 소통은 댓글로 대체된다. 직접 만나지 않아도 일은 돌아간다. 하지만 기억은 남지 않는다. 관계의 온도가 사라지고, 감정의 흔적이 증발하기 때문이다.

추억이란 결국 ‘체험의 기록’이다. 냄새와 빛과 온도의 조합으로 기억되는 것인데, 이제는 상상과 SNS 같은 사이버 소통이 추억으로 남는다. 사이버 공간이 확장될수록 현실 공간의 기억은 퇴색된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숙제는 기술이 아니라 감각의 복원이다.

AI 시대의 최대 위험은 생각의 자동화가 아니라, 감정의 탈 현장화다. 인공지능은 수많은 데이터를 결합해 패턴을 찾아내지만, 그 속엔 현장의 떨림이 없다. 사람의 목소리, 공간의 기온, 시간의 흐름 같은 비데이터적 요소는 기록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차별은 ‘직접 느끼는’ 능력이다.

이번 APEC 경주 회의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보도와 브리핑이 쏟아졌지만, 진짜 의미는 현장에서만 읽힌다. 경주의 하늘, 보문호의 잔잔한 물결, 세계 정상들이 오가는 그 거리의 공기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외교의 질감이 있다. 외교는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사람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서사다.

한국 외교의 진짜 시험대는 APEC 회담장의 의제가 아니라, 그 공간을 어떻게 체험하고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현장에서 느끼지 못한 외교는 언제나 공허하다. 책상 위에서만 논의된 외교는 이념이고, 현장에서 체득한 외교가 문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9일, 관세 협상의 최대 쟁점이었던 총 3500억달러의 대미 투자펀드 가운데 2000억달러를 현금 투자하되 연간 한도를 200억달러로 제한하기로 하고, 상호 관세와 한국산 자동차·부품 관세를 25%에서 15%로 조정하기로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핵추진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도 정상회담이라는 현장에서 이뤄졌다.

이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독자가 있는 거리로, 정치하는 사람은 민심이 있는 현장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대통령은 세계 정상이 모이는 국제 무대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감동이 생기고 현장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공간은 생각을 바꾸고, 시간은 시선을 바꾼다. 직접 만나서 느끼고, 직접 보며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사이버 시대의 역설이자,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세다.

현장은 언제나 진실을 품고 있다. 다만 우리는 종종 책상 앞에서만 판단하고, 직접 발로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진실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외면한 그 현장 속에 있다. 그리고 진실은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그곳에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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