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국가 폭력 사태나 집단학살이 일어났을 때 사건의 책임자들을 포함해 모든 가담자에게서 들을 수 있는 책임 회피성 진술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책임을 물었던 1차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된 24인의 지도자 대다수가 주장한 변론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의 변명은 참작되지 않았고, 3명을 제외한 모두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중 12명의 피고인은 사형에 처해졌다. 그럼에도 지시 체계 최하단서 명령에 따라 잔혹한 행위를 수행한 사병들과 부사관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는 논쟁의 대상이 됐다.
강압적 상황서 명령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일시적으로 자유의지가 없어지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그토록 잔혹한 행위들을 단순히 명령 때문에 실행할 수 있는 걸까?
<명령에 따랐을 뿐!?: 복종하는 뇌, 저항하는 뇌>는 에밀리 A. 캐스파 벨기에 겐트대학교 실험심리학과 부교수가 2016년부터 지속해 온 자신의 연구들을 정리해 명령에 복종할 때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인지신경과학 과정을 밝힌 책이다. 책은 또한 방대한 사회·심리학 및 인지신경과학 자료를 분석해 집단 학살·집단 폭력 사태가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종합 지식을 제공한다.
이 책은 단순히 연구 결과를 나열한 책이 아니다. 명령에 복종할 때 일어나는 개인의 신경 작용은 기존 사회·심리학 연구에 대한 분석과 통합을 통해 사회 현상을 파악할 수 있는 넓은 이해로 확장된다. 즉 저자의 연구들은 집단학살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패치워크와 같다.
예를 들어 집단학살이 발생한 르완다와 캄보디아서의 가해자 인터뷰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들이 저마다 다른 형태로 고백하는 예의 명령에 복종했다는 취지의 진술은 실험 결과가 말해주는 뇌의 신경 작용이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는지 놀랍도록 선명히 보여준다.
또 명령받는 자뿐만 아니라 명령을 내리는 자 역시 낮은 수준의 책임감을 느낀다는 실험 결과는 책임 분산에 대한 기존 연구들과 상응하며 군대 등 계층 구조서 집단 폭력이 쉽게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해 준다. 공감에 대한 연구 해설도 눈여겨볼 만하다.
명령을 받을 때 공감과 관련한 뇌 활동의 감소는 인간이 외집단과 내집단에 차별적 공감을 보인다는 진화론과 사회심리학의 범주화 및 비인간화 연구 내용과 결합해 집단 폭력의 총체적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다.
신경학 수준서 복종의 메커니즘을 확인하려는 저자의 실험 의도에는 사회 개입에 대한 고려가 이미 전제돼있다. 복종에 의한 잔혹 행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사회가 이를 예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실험 결과는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주체적 의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그에 더해 책은 실제 역사에서 부도덕한 명령을 거부하고 타인을 도우려고 노력했던 이들도 소개하고 있다. 르완다 집단학살 당시 적극적으로 구조 활동을 했던 펠리시앙 바히지와 주라 카루힘비 등에 대한 이야기서 독자들은 희생을 감수하며 정의를 택한 이들의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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