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⑬막막한 엄마 찾기

  • 김영권 작가
2024.07.29 04:00:00 호수 1490호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자, 가자꾸나. 조금만 가면 따뜻하고 아늑한 방이 있단다.”

여인은 용운의 팔을 잡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용운은 일어나지 않고 버텼다. 그는 결정하기 전에 마지막 확신이라도 얻으려는 양 여인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여인은 역시 입으로만 상냥스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은 전혀 표정이 없었으며 차가운 빛을 안쪽에 감추고 있었다.

여인의 미소는 점점 요염해졌다. 그러면서 가늘고 흰 손으로 용운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대합실서의 꿈


“아, 안 돼요! 난 안 가요! 여기서 울 엄마를 기다려야만 해요!”

“엄만 안 온단다. 얘야, 어서 가자꾸나.”

“거짓말 마요! 엄마는 꼭 온댔어요! 아줌마는 백여우 같아요. 난 절대로 따라가지 않아요. 그러니 어서 저리 가세요!”

“호호, 내가 백여우라구? 호호호, 넌 미친 녀석이로군. 그 자리서 굶어 뒈져 버려.”

여인은 용운의 눈빛을 보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악담을 뱉곤 슬그머니 대합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대합실은 적막에 잠겨 갔다. 밤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용운은 쓰레기장에서 신문지를 주워 와 깔곤 누워 옹크렸다.

엄마 잃은 어린 소년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간간이 흐느끼는 한편 차가운 냉기가 몸속으로 스며드는지 이를 부딪치며 달달 떨었다. 밤은 깊어갈수록 점점 추워지고 밖에서는 바람이 빈 깡통을 굴리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마당가의 허물어진 화단엔 꽃보다 잡초가 더 무성하다. 거무죽죽하게 말라 구겨져 버린 지 오랜 장미 아래에 맨드라미와 봉숭아가 피어 있다. 

아이는 봉숭아의 푸른 열매를 톡톡 건드려 터뜨리다가 한숨을 쉬고 입맛을 다신다. 다섯 살이 될까말까한 어린 아이의 눈에 무료감이 어린다.


아침나절 내내 혼자 놀았던 기억들이 중첩되어 어린 넋에 시간을 인식케 하는 걸까. 아이는 하늘을 쳐다보고 주위를 둘러본다. 바람 한 점 없이 괴괴하다.

아이는 다시 화단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쌀눈만큼이나 작은 풀꽃을 찾아 한참 들여다보다가 발작적으로 봉숭아 꽃잎을 훑어 따서 마당에다 흩뿌린다. 

한여름의 태양이 중천에 이글거리며 따가운 빛을 내리쏘고 있다.

울 듯한 표정으로 자기가 버린 꽃잎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의 눈에 빛이 돈다. 멀찍이 날아 떨어진 분홍 꽃잎이 움직인다.

다른 것은 가만 있는데 한 잎만 옴직거린다. 아이는 새끼 고양이처럼 기어 다가간다. 꽃잎 밑에서 통통한 구더기가 불쑥 기어 나온다.

구더기가 꼬물꼬물 전진하자 아이는 검지손가락 끝으로 강아지의 등을 쓰다듬듯이 살살 어루만진다. 구더기는 기겁을 하고 옆으로 나뒹군다.

구더기가 줄행랑을 놓자 아이는 작은 손바닥을 앞에 세워서 거대한 벽을 만들고는 웃는다. 구더기는 이물질에 닿자 방향을 돌리지 않은 채 바로 꽁무니를 머리로 변전시켜 달아난다.

아이의 손가락 끝이 추적자가 되어 말발굽 소리를 내며 뒤따른다. 엎드린 아이의 몸은 곰이나 거인 같다. 도망자는 발굽에 짓이겨진다. 아이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노르스름한 구더기들이 몇 마리나 줄을 지어 다가온다. 맞은쪽 구석에 붙은 재래식 변소가 그것들의 고향이다. 아이의 머리엔 그 작은 생물들이 더럽거나 징그럽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듯싶다.


그의 눈엔 귀엽고 재미있는 모습으로 비치는지 모른다. 아이는 구더기를 집어 손바닥에 올려놓곤 가지고 논다.

윤기 흐르던 구더기의 몸은 먼지를 타서 꾀죄죄해지고 차츰 홀쭉해진다. 활발하던 움직임도 조금씩 둔해지더니 이윽고는 멈추고 만다. 

꿈에서 느낀 전쟁 공포감
다시 만나자 무언의 약속

아이는 울적히 내려다보더니 그 중의 한 마리를 집어들어 입 속에 넣고 씹어 본다. 한 마리를 더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날카로운 폭음이 하늘을 가르며 울려퍼진다. 아이는 움찔 놀란다. 폭음은 증폭되어 천지를 진동시킨다.

아이는 해쓱해진 얼굴로 하늘을 쳐다본다. 일단의 전투기 편대가 염천을 찢고 지나가며 길고 허연 생채기를 남기고 있다. 전투기는 태양보다 더 높이 떠가는 것 같다.

그 가운데 한 대의 기체로부터 은빛 광채 눈부신 폭탄 두 발이 투하된다.

그것들은 수리보다 빠르게 지상으로 하강하여 엄청난 폭발음을 일으킨다. 아이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외부의 어떤 다른 소리도 듣지 않겠다는 듯이 고집 센 울음이다. 아이의 크게 벌어진 입 속엔 허연 구더기의 찢긴 살점들이 진물과 함께 흩어져 있다.

아이의 울음 소리가 잦아든다. 갑자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멎었다가 다시 저절로 떨린다. 아이는 손을 가져가서 비빈다. 떨림은 멎는다. 그는 한곳을 쳐다본다.

큰 거미 한 마리가 구석에 웅크려 있다가 빠르게 허공으로 기어 나온다. 똥파리가 줄에 걸려 맹렬히 파닥거린다. 거미는 발빠르게 움직이며 파리를 옭아맬 기회를 노린다.

유심히 살펴보는 아이의 눈이 깜박깜박한다. 동공이 점점 커져 가고, 머루처럼 검은 눈동자엔 공포감이 어린다…. 

용운은 부르르 떨며 눈을 떴다. 꿈인지 생시인지 아리송했다.

그는 일어서서 이리저리 거닐었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용운은 사흘을 기다렸다. 누군가 가엾게 여겨 던져준 동전 몇 푼으로 풀빵을 사먹으며 견뎠다.

그러나 엄마는 아무래도 오지 않았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은 용운은 그 자리를 떠났다.

엄마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이상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직접 돌아다니며 찾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용운은 현기증과 싸우며 남산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를 때는 눈앞이 가물가물해져 엎어질 것만 같았다. 용운은 이를 악물고 걸어 올라 겨우 한 계단 위에 주저앉았다.

지난번에 엄마와 함께 앉아 소나무 껍질을 갉아 먹었던 곳이었다.

“엄마….”

용운은 중얼거리며 일어서서 다시 계단을 올랐다. 저 위쪽, 하얀 탑과도 같은 건물이 우뚝 솟아 있는 그곳에는 엄마가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엄마가 자기를 데리고 이곳에 올라왔던 이유는, 저 탑을 표지로 삼아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무언의 약속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엄만 꼭 오실 거야. 아니, 이미 저 위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 엄만 나를 내버린 게 아니고, 어떤 비밀스런 중요한 일이 있어 잠시 다녀오실 거야.”

불안한 눈빛

용운은 힘을 내어 남산 정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눈앞이 탁 트인 넓은 광장을 바라보며 용운은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렸다.

흰 적삼에 검정 무명치마를 입었던 엄마는 어디에도 없었고, 또 그 넓기만 하고 무정한 곳에서 언제 어떻게 엄마를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혹시 엄마에게 무슨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았는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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