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소록도 천사’ 마가렛 피사렉

2023.10.10 14:16:28 호수 1448호

조건 없는 39년 헌신의 삶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1935년 6월9일, 폴란드서 태어난 ‘작은 할매’이자 ‘할매 천사’로 불린 마가렛 피사렉. “한국서 행복하게 살았어요.” 그는 건강상 이유로 한국에 떠난 뒤 이렇게 말했다. 평생을 봉사하며 사는 삶. 한국은 할매 천사 마가렛 피사렉 간호사와 마리안느 스퇴거 간호사가 보인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전남 고흥군에 있는 작은 땅 소록도. 섬 모양이 작은 사슴과 닮아 소록도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다. 평범한 섬이라고 불리지만 한국 근현대사 속에 큰 아픔을 품고 있는 섬이다. 소록도에는 한센병 환자의 수용소가 있었다. 한센병은 나병이라고도 불렸는데 피부, 말초, 상기도의 점막을 침범해 조직을 변형시키는 감염병이다. 

파란 눈의
두 간호사

일제강점기 때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를 모아 가두는 고립의 장소였다. 소록도에 있는 국립소록도병원은 1917년부터 한센병 환자를 수용했다. 한센병 환자는 ‘문둥이’라고 버스에 타지도 못하고 일주일을 넘게 걸어서 국립소록도병원에 갔다. 

이곳에서 한센병 환자는 거주 이전의 자유와 이동권을 박탈당했다. 툭 하면 감금, 감식, 체벌의 징벌을 받기도 했다. 이런 소록도에는 5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옆에는 안내판이 있는데, 여기에는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님’이라는 제목에 사진 네 장과 함께 설명문이 남겨있다. 

바로 이 설명문 건너편에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 간호사와 마가렛 피사렉(Margareth Pissarek) 간호사가 머물렀던 관사가 있다. 넓지 않지만 정갈한 집이다.


좁은 마루 한구석에 호롱불이 놓여 있고 방에는 무, 하심, 사랑, 애덕,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와 같은 글씨가 성모상과 묵주와 함께 걸려 있다. 한쪽 변엔 오래된 카페트 테이프가 반듯이 꽂혀 있다. 헝가리 광시곡과 아베마리아, 스크린 뮤직과 플라시도 도밍고 등이다.

이처럼 끔찍한 역사를 지닌 소록도에 두 명의 파란 눈 천사가 자리 잡기까지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1960년대는 한센인의 인권이 전무하다 싶을 때다. 당시 조창원 원장은 5‧16 군사혁명 이후 병원장으로 육군 대령의 계급이었다. 조 병원장은 한센인들에게 “당신들도 사람이다. 자식을 낳아라”는 말을 했다. 강제 낙태가 당연하던 시기에 혁명적인 발언이었다.

문제는 한센인이 자식을 낳아도 키워줄 사람이 없었다. 전염의 공포 때문이었는데, 외국 간호사가 필요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이 미국인으로, 병원장이 헨리 대주교에게 한센인 자녀를 키울 간호사를 요청했고, 헨리 대주교는 유럽을 가는 길에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 방문해 교구장에게 소록도서 한센인 자녀를 키울 간호사를 부탁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두 간호사가 소록도에 온 것이다.

이들은 각각 1962년과 1966년에 가톨릭교회의 재속회인 오스트리아 그리스도왕 시녀회 회원으로 소록도 땅을 밟았다. 이때 마가렛 간호사의 나이가 28세였다. 그때부터 시작해 가톨릭교회의 공식 파견 기간이 끝난 뒤에는 자진해서 간호사 자원봉사자로 남아 39년 동안 조건 없이 한센병 환자와 환자의 자녀를 보살폈다.

그 후 마가렛 간호사는 지난달 29일, 향년 88세로 오스트리아서 심장마비로 선종했다. 최근 치매로 인스브룩시 시립양로원에 머물던 중 넘어져서 대퇴부가 골절돼 수술받던 중이었다.

대한간호협회는 서울 중구 대한간호협회 마가렛 간호사의 추모식을 진행하며 “세상 모든 아픈 이를 비추는 따뜻한 별이 된 마가렛 간호사를 대한민국 50만 간호사 모두가 기억하겠다. 마가렛 간호사의 희생정신에 깊이 공감하며,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추모한다”고 밝혔다.

39년 동안 국내 한센병 환자·자녀 케어
결핵병원, 정신과 병동, 목욕탕 등 설립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자신의 SNS에 “고인의 고귀했던 헌신의 삶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이제 하늘 나라서 편히 쉬기를 기원한다. 마가렛 간호사의 명복을 빌며 투병 중인 마리안느 간호사의 건강을 기원한다”고 밝혔다.

공영민 고흥군수는 전남 고흥군 도양읍 마리안느와 마가렛 기념관에 마련된 소록도의 천사 마가렛 피사렉 분향소에 고흥군의회(의장 이재학) 의원, 간부 공무원 등 40여명과 함께 방문해 그의 선종을 애도하며 헌화 분향했다고 밝혔다.


분향을 마친 공 군수는 “평생을 사랑과 희망의 씨앗을 한센인에게 나눠준 작은 할매, 소록도의 천사 마가렛 피사렉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그녀의 숭고한 정신과 희망의 메시지를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고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마가렛 간호사가 소록도에 자리 잡고 한센병 환자를 보살핀 것만 39년이다. 그가 소록도를 떠난 2005년 11월23일 아침에도 평소처럼 환우들 곁에 가서 따뜻한 우유를 따라주고 아픈 데를 살피고는 홀연히 떠났다.

이후 편지가 배달됐다. 이들은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저에게 아주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저희들이 천막을 접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사회복지 시스템이 잘돼있어서 우리는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70살이 넘은 나이입니다. 소록도 국립병원 공무원들은 58~60세 나이에 퇴직합니다. 우리 나이가 보통 은퇴하는 나이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고 소록도서 오랜 시간 있었던 것을 언급했다.

아울러 “지금 한국은 사회복지 시스템이 잘돼있어 우리는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없어도 환자들을 잘 도와주는 간호사가 있어서 마음 놓고 갑니다. 이곳에서 같이 지내면서 저희의 부족으로 마음 아프게 해드렸던 일을 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빕니다. 항상 기도 안에서 만납시다”라고 덧붙였다. 

숭고한 정신
영원히 기억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소록도를 떠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소록도를 떠나기로 한 것은 건강 때문이었다. 마리안느 간호사는 2003년부터 대장암으로 투병 중이었다. 한국서 수술만 세 차례 받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다. 마가렛 간호사도 일흔을 넘겨 건강에 자신이 없는 상태였다. 소록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던 두 사람은 제2의 고향인 소록도를 조용히 떠난 것이다.

당시를 회상하며 마리안느 간호사는 “그때는 아프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결정을 하는 게 마음이 아프고 어려웠다. 소록도를 떠나는 배에서 우리도 눈물을 많이 흘렸다. 돌아가서도 이곳 친구들이 그리웠다”고 전했다.


이토록 끊이지 않는 추모가 이어지는 것은, 자신의 선의로 한센병 환자를 돌본 것 자체도 엄청난 일이지만, 마가렛 피사렉이 소록도서 단순히 한센병 환자를 돌보기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록도에 있는 한센병 환자가 출산을 하면, 한센병 환자인 부모는 아기를 5세까지만 키울 수 있다. 그 뒤로는 미감아 수용소로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여기서 말하는 미감아란, 한센병 환자가 출산한 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를 말한다. 소록도에는 6000명의 한센인이 있었다.

한센병 환자의 자녀를 미감아 수용소에 보내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한센병은 모태로부터 유전되지 않는 병이다. 두 간호사는 정부도 나서지 않는 한센병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고, 보육‧자활 사업을 정착시켰다. 

이뿐이 아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에 의약품과 경제적 지원을 요청해 소록도를 도왔다. 자국도 기피하는 한센병 환자를 보살폈던 것이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 교정수술을 하는가 하면, 물리치료기 등을 도입해 환자들의 재활을 도왔다. 

사랑과 희망
선한 영향력

소록도에 결핵병원, 정신과 병동, 목욕탕 등이 세워진 데도 이들의 도움이 컸다.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 등을 통해 소록도에 필요한 시설을 짓는 데 필요한 예산을 마련했다.

두 간호사의 헌신과 진심에 병원 직원도 변화됐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5월 조선총독부는 한센병 환자를 강제 격리하기 위해 자혜의원(현 소록도병원)을 만들었다. 당시 일본인은 소록도에 있는 환자에게 나이와 상관없이 반말을 하고, 구타를 일삼았다. 임신한 여성에겐 낙태 수술을, 남성에겐 불임수술이 강제로 시행됐다.

해방 이후에도 이 같은 문화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환자들은 직원을 ‘선생님’으로 부르며 떠받들어야 했고, 환자에게 막말을 하는 직원도 있었다.

하지만 마리안느 간호사와 마가렛 간호사는 환자들에게 나이와 상관없이 존댓말을 썼다. 스스럼없이 한센인과 식사를 하고, 매일 새벽 5시부터 나이 든 환자의 병실에 따뜻한 우유를 배달했다. 본인의 집에 환자를 초대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환자 생일엔 직접 생일 케이크를 구워 선물했다.

당시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들은 전염을 우려해 진료를 한센병 환자를 진료할 때 꼭 장갑을 꼈던 것과 달리 두 사람은 맨손으로 피고름을 짜고 약을 발라줬다. 병원 직원들의 편견과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고 한센인을 친구로 받아들였다.

이들의 선행이 알려지자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잇따랐지만 두 사람은 한사코 거부했다. 정부나 단체가 주는 상도 마찬가지로 사양했다.

고국인 오스트리아 정부서 훈장을 수여하겠다고 전해왔지만 거절해 오스트리아 한국대사가 직접 소록도를 찾아 전달했을 정도였다. 한국 정부가 준 국민포장(1972년)과 국민훈장 모란장(1996년)도 청와대 관계자가 소록도를 찾아와 수여했다.

가족처럼 친구처럼 돌봐
고국 오스트리아서 선종

2016년 6월20일,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한센인 단종‧낙태에 대한 국가손해배상 소송이 국립소록도병원서 특별법정으로 꾸려졌다. 그 자리서 증인으로 나선 김인권 여수 애양병원장은 당시 마가렛 간호사와 마리안느 간호사가 소록도 내에서 자행되는 단종‧낙태에 관해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김 원장은 재판에 출석해 ‘그들이 단종·낙태에 어떤 입장이었는지’ 묻는 말에 “개인적으로 반대했을지는 몰라도 소록도 실정에 이게 꼭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일체 관여도 안 하고 개인적인 의견을 병원 당국에 전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정부는 마가렛 간호사와 마리안느 간호사를 재판정 증인으로 세우려고 했으나 이들은 출석하지 않았다. 이들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외국서 자원봉사하러 온 사람이 국가 정책에 쓴소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이미 시간이 지나 그 이유를 캐묻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리안느 간호사는 일생 첫 기자간담회서 그간 인터뷰를 거절한 이유에 대해 “특별한 일이 아니어서”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특별한 일을 한 게 아니다. 그저 예수님의 복음을 따랐을 뿐이고 환자를 돕는 게 좋았다. 진짜 특별한 일은 하나도 안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 간호사는 한국을 떠난 뒤 오스트리아서 빈곤층이 받는 최저 수준의 국가연금으로 민가와 양로원서 생활했다. 이들이 속한 그리스도왕국시녀회가 일반인과 함께 속세에 머물며 생활하는 재속회 소속이라 돌아갈 수녀원이 없었다. 그런데도 한국 측에서 제안한 노후 보장과 금전적인 지원은 사양했다.

마가렛·마리안느 간호사는 2019년 유럽을 순방 중인 김영록 전남도지사를 만났다. 김 지사가 직접 오스트리아 티롤 주 인스브루크 요양원을 방문했던 것이다.

마리안느 간호사는 김 지사와의 면담서 “이곳까지 찾아와주고 관심을 가져줘 고맙다. 소록도서 환자들과 보냈던 생활이 그립다”고 말했다. 마가렛 간호사는 현재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어 김 지사 일행과 긴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찾아줘서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두 간호사는 김 지사 일행과 함께한 자리서 “다시 태어난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나주 빛가람동 주임신부인 김연준 프란치스코 신부는 마가렛 간호사를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소록도 사람들의 엄마이자 누나, 언니였다. 가장 낮은 자세로 세상을 섬겼던 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바깥에선 수녀님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마가렛은 스스로를 할매라고 불러주면 기뻐했다. 특혜나 권위를 버리고 소록도 모두와 하나가 돼 가족처럼 지냈던 사람이다. 마가렛의 이야기는 사람이 남을 도울 때 가장 행복한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편안하길”
추모 발길

김 신부는 “보통 봉사하면서 자기만족을 찾기 마련이지만 마가렛은 그런 뜻 없이 한센인을 평생 섬기기만 했다. 내 삶의 모델이었고, 10년 후 한센인을 돕기 위해 소록도 성당 주임신부를 자원해 가게 된 것도 마가렛의 영향이었다”며 “마가렛의 이야기는 사람이 남을 도울 때 가장 행복한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갈등이 증폭되는 시대에도 인간에겐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추켜세웠다. 

아울러 “마가렛이 떠난 것은 슬프지만 한편으론 평생 변함없는 모습을 지킨 채 하느님 곁으로 갔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하다. 마가렛이 남긴 선한 영향력을 확장해나가는 게 남은 우리들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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