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대통령의 뒷모습 ㉜천국과 지옥을 오가다

  • 김영권 작가
2023.05.11 00:00:00 호수 1426호

김영권의 <대통령의 뒷모습>은 실화 기반의 시사 에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을 다뤘다. 서울 해방촌 무지개 하숙집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작가는 무명작가·사이비 교주·모창가수·탈북민 등 우리 사회 낯선 일원의 입을 통해 과거 정권을 비판하고, 그 안에 현 정권의 모습까지 투영한다.



“가짜 인간.” 

그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곤 가만히 음미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인간은 사다리가 아닌가 싶어요. 천국과 지옥 사이에 걸쳐져 있는 사다리, 신과 악마 사이를 오르내릴 수 있는 특이한 존재…. 실제로 테레사 성녀 같은 분도 계시고 조두순 같은 악인도 있으니까요.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현실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인간의 탈을 쓴 채 때론 천사처럼 되기도 하고 동물같이 변하기도 하잖아요.” 

우화등선

“흐흐, 그래서 나더러 사다릴 타고 올라가 보라는 건가요? 그러면 이 등딱지가 벗겨져 우화등선할 수 있을까요?”


그는 비틀리고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그건 스스로 선택해야겠죠. 육신이 완전히 환골탈태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마음 상태에 따라 조금은 변하기도 한다잖아요. 자신의 등딱지를 진 상태에서도 선풍도골을 이룬 분들은 멀쩡한 보통 사람보다 더욱 멋있어 보이는 경우도 있고….” 

“흐흣, 그건 전설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죠. 요즘 현실에서는 내겐 그저 관념적인 소리일 뿐 공허하군요.” 

“그래도 변화는 희망이잖아요. 세월이 흐르면 언제 어떻게 수술을 하게 될지 모르는 현실이기도 하구요. 힘을 내세요.”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맥주를 쭉 들이켰다. 한데 그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마음속의 번민을 감추기 위한 위장인지 사실인지 모호했다. 

“그런 꿈을 갖고 열심히 돈을 모았지요. 뒷골목일지언정 내 가게를 차리고 성심 성의껏 애썼더니 단골이 많이 생겨 돈주머니가 불어났어요. 황금 주머니를 찬 꼽추…. 고급 술집에 들어갈 때 처음엔 웬 괴물 양아친가 하고 괄시했지만 황금을 보곤 확 달라져 귀빈 대접을 하더군, 후훗…. 감미로움 속에 빠져들었지. 독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그 당시 난 마흔살 가까운 동정 숫총각이었죠.”

“처음 맛보는 묘한 감각의 세계, 여자의 입술과 젖가슴 그리고 아방궁의 쾌락, 그걸 사람들은 영원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며칠 지나지 않아 싫증이 나더군. 매끄러운 얼굴과 육체미를 탐하다 보면 잘 만들어진 인형과 기계적인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론 흉한 괴물인 내가 가엾은 인어 공주를 능욕하는 듯싶어 내심 두려웠지. 마치 무슨 공황장애에 걸린 것처럼….” 

그는 새 깡통을 따서 꿀꺽꿀꺽 들이켰다. 나도 말 없이 맥주맛과 인생의 맛을 음미했다. 

인간은 사다리…신·악마 사이 오르내려
마흔 넘어 만난 인연, 돈 때문에 뒤통수


“마침 그 무렵 한 여자가 나타났지요. 허름한 변두리 술집에서였죠. 그녀는 생기라곤 없어 보였어요. 나무에서 이제 막 떨어져 내릴 듯한 삭은 목련 꽃잎 같은 느낌…. 난 왠지 내 생명력을 죄다 그녀 속에 수혈해 넣어 윤기 있게 살아나도록 해주고 싶더군요. 평생 처음 느껴 본 애련의 감정…. 정신이 약간 온전치 않았어요. 태어날 때부터 좀 박약했던지…. 그런 만큼 순진무구했지요. 어릴 때 잃어버린 누이동생이나 엄마가 문득 떠올라 겹쳐지곤 했어요. 아니, 더 좋았지요. 마음이 녹아드는 연인이니까.”

“어느 날부터 그녀는 내 아파트에 들어와 살게 됐는데, 나도 그 공간에서 만큼은 괴물 짐승이 아닌 인간다운 느낌을 향유하게 됐죠. 그런데 한 달쯤 지난 후부터 어떤 사내가 오빠라면서 드나들기 시작하더군. 오라비 같지도 않은 건달이었는데 사촌 간이라기에 그런가 보다 했지. 꼬치꼬치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얘, 앵두야, 네 서방은 잠자리에서 널 사랑할 때 어떻게 하니?’ 녀석은 그런 시덥잖은 소릴 예사로 지껄이곤 했지. 어느 날 밤, 셋이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며 맥주를 마시던 중 앵두 그녀는 속이 메슥거린다더니 오랫동안 구역질을 했어. 무척 걱정했는데 다음 날 진찰한 결과 임신이라는 결과가 나왔지.” 

그는 술을 소리 없이 쭉 들이켰다. 

“난 너무 기뻤어. 그 애가 내 애라도 좋았고 아니라도 좋았지.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그녀가 잉태했다는 사실 자체로 축복받았다고 하느님께 감사드렸구먼. 흐흣, 금붙이를 들고 온 단골 아줌마들은 ‘술집 여자였으니 누구 새낀지 어찌 알어? 조심해!’라며 참새처럼 조잘거렸으나 난 다만 맘속으로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빌었어…. 하지만 그 애를 난 보지도 못했죠. 그녀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녀의 배가 볼록해질 무렵부터 난 그녀의 말이라면 다 들어 주었어요.”

“좀 무리하다 싶은 부탁이라도 ‘꼭 해보고 싶은 소원, 꼭 갖고 싶은 꿈’이라고 떼를 쓰면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바보 멍청이 같지만 그때 그게 내겐 행복이었으니까요…. 아무튼 환상에서 깨어나 보니 차가운 현실 바닥에 빈털터리 신세로 내팽개쳐진 꼴이더구먼요. 통장 예금과 아파트 판 돈까지 모두 뚱쳐 종적을 감춰 버렸더군요. 그녀가 직접 그런 짓을 벌였을 리는 없고, 아마 그 오래비라는 놈의 소행이었겠죠. 나중에 꽃사슴이라는 그 변두리 술집에 가서 알아 보니, 놈은 사촌 오빠가 아니라 뒤에서 보호해 주는 척 등쳐 먹는 건달 둥기였다고 마담이 얘기하더군요.” 

“원망스럽고 허무하셨겠네요.” 

“그들을 죽이기보다 오히려 나 자신이 콱 죽어 버리고 싶을 만큼 절망감이 컸죠. 인생과 인간에 대한 절망, 사람도 아니고 짐승이기도 한 듯싶은 내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절망….” 

흉물 잡색

“본인 잘못도 아닌데, 안타까워요.” 


“내 잘못이 크죠. 나도 인간이라는 착각. 흐흐….” 

“그런 말씀 마세요. 사실 이 세상에…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사람의 탈을 쓴 짐승보다 못한 인간 흉물 잡색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저는 차라리 인간의 탈과 거죽을 벗어나고 싶어요.”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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