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한국 노동계를 사실상 양분하고 있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이들은 5년 만에 벌어진 보수세력의 정권 탈환에 씁쓸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대화가 통했던 문재인정부 아래에서 이뤄낸 결실들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빛바랠 위기에 처한 탓이다. 일단은 정권과 대화를 시도하는 모양새지만 반(反) 노조 성향을 공공연히 밝혀온 차기 정부와의 갈등 표출은 결국 시간문제라는 관측이다.
노동계에 있어 문재인정부 5년은 앞선 보수정권 10년에 비하면 봄날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전방위적인 노조 압박이 사라지면서 ‘민중 총궐기’ 등 극한 대립도 잦아들었고, 비교적 협조적인 정부와 소통하면서 각종 성과도 만들어냈다.
각종 성과
특히 노동계에서 꾸준히 주장해온 노동시간 단축·최저임금 상승이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주당 68시간이었던 법정근로시간은 52시간으로 줄어든 반면, 최저임금은 2018년 16.4%·2019년 10.9%로 대폭 인상됐다.
이외에도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제정, 공공 부문 노동이사제 등 노동계 숙원사업으로 불리던 굵직한 사안들도 문정부 들어 제도화됐다.
문제는 윤석열정부가 지난 5년간의 ‘공든 탑’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최저임금제도부터 수술대에 오를 전망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앞서 “최저임금을 200만원으로 잡으면 150만원, 170만원 받고 일하겠다는 사람은 일을 못 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최저임금 재조정·차등 적용 필요성 등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이미 법제화된 제도다. 최저임금법 제4조 1항에는 “최저임금은 업종별로 구분해서 정할 수 있다”고 명시돼있다.
실제 적용된 경우는 1988년 단 한 차례뿐이다. 하지만 문정부 들어 최저임금이 대폭 오르면서 ‘차등 적용 부활’을 요구하는 사용자 측 목소리는 점차 거세져왔다. 지난 5년간 꾸준히 최저임금위원회 안건으로 상정됐고, 매번 부결되긴 했어도 점차 찬반 표 차이가 좁혀지는 양상이다.
이듬해 적용될 최저임금 심의는 내달 5일부터 시작된다. 임기 시작 이전부터 노동계와 차기 정부의 대립이 본격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문 들어 일군 노동 개혁
윤으로 가면 말짱 도루묵?
윤 당선인은 근로시간 규정도 손본다는 방침이다. “주 52시간제를 폐지하겠다고 한 적 없다”고 선을 긋긴 했지만, 공약집에는 재계 요구사항인 ‘노동시간 유연화’가 전면 배치됐다.
구체적 방안으로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 기간 1년 이내로 확대, ‘근로시간 저축계좌’ 연 단위 도입, 주 52시간제 예외 업종 확대 등이 포함됐다.
이와 관련해 윤 당선인은 대한상공회의소 특별강연에서 “주당 52시간이라는 것을 연평균으로 유지하더라도 하는 업무 종류와 노사 간 합의에 따라 유연화할 수 있어야 한다”며 “재택근무가 많아지면 근무시간보다 실적과 질에 따라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도 있다”고 설명했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서도 연이어 우려를 표명했다. 윤 당선인은 지난해 12월 이 법을 겨냥해 “기업인들의 경영 의지를 위축시키는 강한 메시지를 주는 법”이라고 비판한 데 이어 지난 2일 TV 토론에서는 “구속 요건이 약간 애매해 형사 기소 시 여러 문제가 나올 수 있다”고 발언했다.
공공 부문 노동이사제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찬성하고 나섰지만, 현재 입장은 안갯속이다. 윤 당선인과 단일화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선후보(현 대통령직 인수위원장)가 강경한 반대 의사를 드러낸 바 있기 때문이다.
한편 양대 노총은 이 같은 윤 당선인 행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노동개혁 퇴보는 물론이고 대정부 영향력 약화, 노조 활동 압박까지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한국노총은 이번 선거에서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공개 지지한 바 있다. 정책협약을 맺고 대선 승리 실천단 활동까지 이어왔다.
이 같은 전력이 차기 정부의 정책 파트너로 발돋움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실제로 한국노총 지도부를 정면 비판한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회복지문화분과 간사에 임명되면서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한국노총 부위원장 출신인 임 의원은 지난달 한국노총의 이 전 후보 지지 결정을 겨냥해 “한국노총 현 집행부의 퇴행적 사고를 규탄한다”는 취지의 기자회견을 열었던 바 있다.
아울러 그간 이어온 민주당과의 밀월 관계도 빛이 바래게 됐다. 한국노총은 지난 제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와 정책연대를 맺은 이후로 민주당과의 정책 협의 등을 통해 핵심 사업들을 진행해왔다.
내부 분열도 수습해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는 한국노총 산하 노조 다수가 상급 단체 방침에서 이탈해 윤 당선인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전 후보와의 정책협약 체결을 전후로 한국노총 산하 택시노조위원장·부산지역본부 산별 대표자·전국외국기관노조연맹 등지에서 윤 당선인 지지 선언이 이어졌다.
안팎으로 시끄러운 한국노총
민주노총 투쟁 전 대화 시도
내부 이견을 충분히 조절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한국노총 지도부는 이번에 조합원 총투표 대신 840여명 규모 임시대의원회의를 통해 최종 지지후보를 결정했다. 앞서 17대 대선과 19대 대선에서는 지지후보를 결정하기 위해 총투표를 진행했었다.
민주노총의 대정부 투쟁 방침은 더욱 공고해질 전망이다. 민주노총은 지난해부터 “윤석열은 자격 미달이고, 이재명은 철학이 없다”며 양비론적 입장을 견지해왔다. 다만 이 전 후보는 비교적 친노조적인 입장을 낸 것에 반해 윤 당선인은 연일 민주노총을 겨냥한 강경 발언을 쏟아내며 대립각을 세웠다.
더 강한 충돌이 우려되는 이유다.
윤 당선인은 지난 6일 거리 유세에서 “전체 근로자의 4%를 대변하는 강성 노조는 완전히 치외법권”이라며 “강성 노조, 이게 왜 강성인 줄 아느냐. 세고 열심히 해서만 강성이 아니라 불법을 일삼는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도 윤 후보에 대한 비판 공세를 이어왔다. 당선 직후인 지난 10일에도 “(윤 당선인의)노동에 대한 무지와 노동조합 혐오에 기초한 ‘막말’을 볼 때 당장 오늘부터 노동자, 민중의 삶이 더욱 팍팍해질 것이 예견돼 참담하기 그지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각종 집회와 파업을 예고했다. 민주노총은 오는 6월 말 ‘최저임금 인상 등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 9월 말 ‘전국 동시다발 총파업 투쟁’, 11월 전국노동자대회 등을 진행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일단 교감
다만 민주노총은 우선 윤 당선인에게 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지난 21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위원장과 윤 당선인의 만남을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민주노총 측은 “통합의 첫걸음은 상대방에 대한 인정”이라며 “지금이라도 대통령 당선인은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를 열고 노동정책을 구체적으로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