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추억> 캐나다 최초 여자 대표팀

2020.12.21 10:11:40 호수 1302호

독보적인 6인이 남긴 스포츠 명장면 

▲ 에델 캐서우드

[JSA뉴스] 1928년 7월11일 이른 아침, 패니 로젠펠드, 장 톰슨, 머틀 쿡, 플로렌스 제인 벨, 에델 스미스, 에델 캐서우드는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에서 암스테르담을 향해 출발했다. 캐나다 여자 선수로서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위해 일주일간 대서양을 건너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대서양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육상과 체조 종목에 여자 선수들의 참가가 허용된 대회였다. 암스테르담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여성은 육상 종목에 필요한 힘과 체력이 부족하다는 관점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변화로 전체 참가자의 10%에 달하는 277명의 여자 선수들이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참가하게 됐다.

육상에서 여자부 경기는 4x100m 계주, 100m, 800m, 높이뛰기, 원반던지기 등의 다섯 종목이었다. 그리고 캐나다를 대표하는 여섯 명의 선구자들도 원반던지기를 제외한 모든 종목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6명의 선수 모두는 다재다능한 스포츠인이었다. 단발머리 때문에 ‘보비’라는 별명으로 불린 로젠펠드는 올림픽에서 100m와 4x100m 계주에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소프트볼, 농구, 하키에도 능한 선수였고, 3년 전에는 ‘1925 온타리오 레이디스 트랙 앤드 필드 챔피언십’에 출전해 다섯 종목의 정상에 올랐던 선수이기도 했다. 

쿡은 두 종목에 참가할 예정이었으며 테니스, 볼링, 사이클을 포함한 다양한 스포츠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벨은 60야드 허들, 창던지기, 야구공 던지기에서 모두 캐나다 챔피언 자리에 올라 있었고, 캐서우드는 ‘1927 캐내디언 AAU 챔피언십’에서 높이뛰기와 창던지기 우승을 거둔 경력이 있었다.


6명에 더해 한 명의 여자 수영 선수까지, 이 모두는 다른 의미로도 선구자였다. 암스테르담 올림픽 전에도 여자 선수들이 참가할 수 있는 종목은 여러 개 있었지만, 캐나다는 하계 올림픽에 여자 선수를 파견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6명의 참가자들이 마주한 첫 종목은100m. 로젠펠드, 스미스, 쿡, 벨이 올림픽 여자 육상의 첫 발을 내디뎠고, 로젠펠드와 스미스가 결선까지 진출하게 된다.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최초로 허용
육상·체조 종목에 여자 선수들 참가

몇 번의 부정 출발 이후 100m 결선에는 단 네 명의 선수만이 출발선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레이스에서는 16세의 미국 단거리 주자, 베티 로빈슨이 모두를 압도하며 세계 신기록인 12초2로 우승, 로젠펠드는 2위, 스미스는 3위를 기록한다. 하지만 메달 색과는 상관없이 세 사람 모두 올림픽 최초의 여자 100m 메달리스트로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후 로젠펠드, 스미스, 쿡, 벨은 4x100m 계주에 참가한다. 레이스의 전반부에는 미국이 선두를 달렸지만, 마지막 주자 쿡이 벨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을 때 캐나다는 3미터 정도 앞섰고, 결국 캐나다가 48초4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차지했다.

캐나다 스포츠 명예의 전당이 나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네 사람이 한 팀으로 계주를 달려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바통 전달 훈련은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한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여자 100m 결승

높이뛰기 결선은 같은 날, 4x100m 계주 결선에 앞서 열렸다. 높이뛰기에 출전한 캐서우드의 가장 큰 경쟁자는 자신의 세계 신기록을 몇 주 전에 깨뜨렸던 네덜란드의 리엔 지솔프였다. 지솔프는 홈 관중들의 응원을 받는 유리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캐서우드가 여자 선수 최초로 1.595m를 넘으며 신기록을 경신하고 복수에 성공한다. 여기에 더해 캐서우드는 캐나다 최초의 여성 올림픽 챔피언이 됐다.

어쩌면 8월2일 열렸던 800m 경주가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종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800m는 여성이 뛰기에는 너무 먼 거리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경주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렸기 때문이다.

당시 17살이었던 톰슨은 800m에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훈련 중 왼쪽 정강이에 부상을 입게 된다. 그 통증과 부담감은 고등학생이 견디기에는 너무 컸기 때문에 결국 로젠펠드가 함께 출전해 톰슨을 지원해주기로 한다.

두 사람은 7명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결선에 돌입했다. 톰슨은 다리에 여전히 붕대를 감고 달렸지만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 놓은 시점에서도 3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히토미 키누에의 팔에 부딪히는 위기의 순간에는 로젠펠드가 톰슨의 옆에서 달려준 덕분에 순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로젠펠드는 결승선에서 톰슨보다 살짝 뒤쳐지며 4위를 기록, 올림픽 역사상 가장 이타적인 행동 중 하나로 기억되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모두 다재다능한 스포츠인
배 안서 바통 전달 훈련

독일의 리나 라트케가 2분16초9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하는 등 경주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지만, 여자 800m 종목은 이후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빠지게 됐고, 1960 로마 올림픽에 가서야 다시 올림픽 무대로 돌아오게 된다.

6명의 선수들은 캐나다 언론들로부터 “독보적인 6인”이라 칭해졌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자도 육상 종목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1950년 라디오 인터뷰에서 로젠펠드는 이런 말을 했다. 

“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들은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긴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캐나다로 돌아온 독보적인 6인은 영웅적인 환영을 받게 된다. 토론토 시내를 지나가는 퍼레이드에서는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1949년 대부분의 멤버들이 캐나다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은 이들이 참가한 유일한 올림픽이었고, 대부분은 올림픽 이후에 육상을 그만뒀지만, 6인 중 일부는 여성 스포츠를 이끄는 인물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쿡과 로젠펠드는 스포츠에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주장을 이어갔다. 쿡은 몬트리올 데일리 스타의 스포츠 칼럼니스트가 됐고 매주 ‘여성의 스포트라이트에서’라는 칼럼을 기재하며 ‘캐나다의 스포츠 퍼스트레이디’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더 글로브 앤드 메일> 신문의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로젠펠드는 반세기(1900~1950년) 최고의 캐나다 여자 선수로 선정된 것에 더해 캐나다 최고의 여자 선수들에게 수여되는 상도 그녀의 이름을 따 ‘보비 로젠펠드 상’으로 명명됐다.

유산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참가 선수의 10%였던 여자 선수의 비율은 도쿄 2020에서는 48.8%가 됐다. 이처럼 올림픽 무브먼트는 양성 평등의 노력에서 큰 발전을 이뤄냈다. 독보적인 6인의 캐나다 여자 선수들이 여성 스포츠의 발전에 이바지해온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유산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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