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장수마을의 꿈’

2012.01.05 12:35:00 호수 0호

달동네 골목골목에 꽃이 피니 무지개가 뜨더라!

[일요시사=김설아 기자] 한국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먹고 살 길을 찾아 서울로 찾아 들었다. 가난한 이들은 저마다 사연을 안고 조금 더 싼 집을 찾아 달동네로, 변두리에 터를 잡았다. 산비탈의 빈터였던 서울 성북구 삼선동 서울성곽 아래에도 집들이 하나 둘 돋아났다. 그로부터 40여 년. 낡아버린 추억을 털어내듯 많은 달동네들이 재개발에 떠밀려 자취를 감췄다. 으리으리한 아파트들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성곽아래 위치한 ‘장수마을’은 세월의 흔적을 품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장수마을의 골목골목 사이로 주민들의 꿈이 익어가고 있었다.

7년째 진척 없는 재개발 ‘주민들 스스로’ 가꿔나가
골목정원 만들기, 벽화그리기, 빈집 고치기 등 활동

장수마을은 낙산자락의 서울성곽을 등지고 미아리 방향의 가파른 비탈에 자리 잡은 작은 달동네다. 주택 대부분이 40~50년이 지난 노후주택이며, 3평 미만의 쪽방 가옥들이 매우 많다.

산언덕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탓에 도로는 좁고 가파르며, 보행환경 역시 매우 열악하다. 천과 돌로 엉성하게 얹힌 지붕, 갈라진 외벽, 도시가스는 인입되지 못하는 등의 기반시설이 미비하여 한눈에 봐도 주거지 정비 사업이 절실한 곳이다.

현재 장수마을엔 150채 314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마지막 달동네
그리고 재개발의 그늘

장수마을은 지난 2004년 서울시 도시주거환경정비계획에 따라 재개발예정지역으로 지정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숨을 고르며 올라야 할 만큼 고지대에 있는데다가 마을 양쪽에 자리한 서울성곽, 삼군부총무당 등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일반적인 재개발 예정구역과 비교해볼 때 용적률과 층수의 제약조건이 많다.

산비탈의 높은 경사도와 층수 제한으로 인해 충분한 건축면적을 확보하기 어렵다. 때문에 일반 분양분이 거의 나올 수 없어 분담금을 낮출 수 없고, 경사가 가파른 언덕에 위치한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토목공사 비용도 만만치 않다.

52년째 장수마을에 살고 있는 김용주(59·남)씨는 “2004년에 일부 주민들끼리 모여 추진위 구성을 시도하고, 조합원 분담금 경감을 위해 7층 이하의 층고제한을 12층까지 요구했으나 실패했다”면서 “2006년 이후로는 포기상태로 주민들의 재개발 관련 활동이 없었다”고 말했다.

민간투자자들 역시 손을 놨다. 고층아파트를 지어 개발이익이 남아야 시공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합설립추진위원회도 구성하고 구역지정을 위한 노력도 가능하지만 장수마을은 일부만 7층 정도의 건물을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개발이익을 기대할 수 없다. 때문에 재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가능성이 낮다.

장수마을의 또 하나의 난제는 바로 체납된 국공유지 변상금(토지점용료)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60~70년대에 빈땅, 싼집을 찾아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정착한 사람들이다.

빈터를 찾아 지은 집들이니 구역 내 64.3%가 국공유지에 대한 불법점유상태이고, 92년도부터 사용료 부과정책에 따라 변상금이 부과되고 있다. 최근에는 공시지가가 많이 올라서 1년에 300만원~600만원 정도의 변상금이 부과되고 있고, 주민의 대부분이 체납하고 있는 상태다. 

자기 땅을 갖지 못하고 국공유지 무단점유자로서의 고단한 삶이 50여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마을 주민 김성녀(59·여)씨는 “좁은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며 둘이 살고 있는데 1년에 변상금이 몇 백만 원씩 나온다. 그마저도 안내면 집으로 딱지가 날아오는데 미칠 지경이다”라며 “50년간 살아온 땅인데 갑자기 불법거주라며 변상금을 물리는 게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건축물은 등기가 돼 있어 불법 상태는 아니지만 토지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주택의 신축, 증축, 개축은 불가하며, 개보수에도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 어떠한 정비방식을 선택하더라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국공유지를 불하받아야 하지만, 노인가구가 많고 소득 100만 원 이하인 가구가 40%에 달하는 장수마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이홍분(76) 할머니는 말은 가슴에 와 닿았다.

“나 살아있을 동안만이라도 그냥 이대로 놔뒀으면 좋겠어. 혼자 사는 노인이 돈도 없고 갈 곳 도 없는데 쫓겨날 바에야 재개발이고 뭐고 난 안 되는 게 나아. 사람 사는 게 이렇게 힘들어…. 나이가 들어도 방 한 칸 가지고 산다는 게 이렇게 복잡해.”



사람·동네·골목·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

그렇게 7년이 지났다. 언제 헐릴지 모를 ‘죽은 동네’로 불리던 장수마을엔 어두운 그림자 대신 새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장수마을 주민들이 쫓겨나지 않으면서 스스로 생활여건을 개선해 나가고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춰 나가고자 한 것이다.

그 첫 번째가 ‘텃밭 가꾸기’이다. 마을 주민들은 집집마다 옥상이나 담벼락, 길모퉁이를 가리지 않고 자투리 공간마다 화단을 만들거나 화분을 놓아 화초를 가꿨다.

쓰레기로 방치됐던 공터를 치우고 장미덩굴을 심었다. 주민들은 땅 한 뼘도 그냥 놀리지 않고, 비닐하우스까지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재개발예정지가 되면서 급속도로 황폐해진 마을에 ‘다시 이곳을 가꾸고 살자’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였다.

이외에도 장수마을 주민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 골목 디자인에 대해 논하고, 직접 집수리를 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장수마을 골목 곳곳을 어떻게 가꿔나가면 좋을지, 주민쉼터는 어떻게 가꿀지 등에 대해 토론하는 한편, 계절이 바뀔 때면 이를 대비해 집수리 교실에서 그 대비법을 배우고 실습하는 시간도 가졌다.

외부의 도움으로 ‘희망의 벽화 그리기’도 진행됐다. 한성대 예술대학 소속 학생 100여명이 장수마을의 담벼락과 계단에 그림을 그리는 봉사활동을 한 것이다. 학생들은 주민의 의견을 묻고서 ‘꿈을 그리는 나무’ ‘동심’ ‘포도 넝쿨’ 등을 주제로 20여 가구 담벼락 등에 벽화를 그렸다.

낡고 위태로운 환경 개선하여 사람 사는 동네로~
“낡았다고 엎어버리는 행태에 경종 울리는 장소되길”


이러한 노력으로 최근에는 장수마을의 경사가 심하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다양한 집의 생김새, 벽화를 찾아 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 올해 초에는 성북구로부터 장수마을이 ‘마을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장수마을 대안개발연구회의 박학룡씨가 ‘동네목수’라는 마을기업을 만들어, 건설업 일용직을 하던 주민들을 고용해 마을 보수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기 때문이다.

장수마을의 ‘동네목수’는 방치된 빈집을 고쳐서 새로운 보금자리로 만들고, 수리가 필요한 집을 고치는 등 동네 곳곳을 가꿔나가고 있다.

이와 관련 성북구 관계자는 “난관에 봉착해 있던 장수마을의 재개발에 대한 대안으로 주민 주도의 ‘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고 배경을 밝히며 “주거환경이 열악한 장수마을의 독거노인, 저소득 장애인 등 취약계층을 우선 대상으로 집수리사업을 전개해 주거환경을 개선하기로 했으며 나아가 벽화사업, 상자텃밭 운영 등을 통해 주민주도의 지역공동체를 형성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성북구 장수마을은 뉴타운, 재개발, 재건축 등 개발위주의 사업이 아닌 주민주도의 사업 시행을 통해, 원주민이 안착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마을기업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으로 기대 된다”고 전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꿈꾸다

옥탑으로 올라가는 좁디좁은 계단, 주황빛 빨랫줄에 나란히 걸어놓은 옷가지들, 사람 한명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길.

장수마을은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직도 시골의 정취와 인정이 남아 있는 곳이다.

휴일이면 골목골목 집집마다 문을 열어 놓고 한 집처럼 서로 왕래하고, 길가 나지막한 옥상에는 이 집 저 집 빨래를 같이 널기도 한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환갑이 넘은 할머니가 이 마을로 시집올 때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할머니가 시집올 당시 중학생이던 옆집 아이는 지금 어느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누님 동생하며 식구처럼 지낸다.

골목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누구 집 자식이든 친손자처럼 너나없이 보살펴주고 떠돌이 개와 고양이에게도 모두가 주인이 되 주는 곳. 이것이 장수마을의 풍경이다.

분명 장수마을이 사람이 살기에 낡고 불편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곳엔 따뜻하고 투박한 손길이 있고, 켜켜이 쌓아온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다. 연출로는 결코 모방할 수 없기에 그냥 이대로 장수마을을 남겨두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다행히 수익성 문제로 재개발이 지연되는 틈을 타, 장수마을엔 주민들의 꿈과 함께 희망이 피어오르고 있다.

장수마을의 이런 변화가 마을을 갈아엎고 살던 사람을 ?아내는 개발의 시대에 경종을 울려 낡고 허름한 동네도 사람들이 떠나지 않게 천천히 고쳐나가면 더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도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작권자 ©일요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Copyright ©일요시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