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최순실 게이트’로 사면초가 상황에 놓인 박근혜 대통령이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과 관련해 연루자들을 엄단하라고 지시했다. 비선 실세 국정농단 의혹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진 박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지시에 정치권은 크게 술렁였다.
이를 두고 성난 민심의 칼끝을 돌리기 위한 ‘국면 전환용’이라는 말이 야권을 중심으로 흘러나왔다. 일각에선 박 대통령이 띄운 ‘승부수’가 자칫 본인과 여권 전체의 공멸을 야기하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부산 해운대 초고층 주상복합단지 엘시티(LCT) 사업 비리 핵심 피의자로 지목된 이영복 회장이 지난 10일 자수 형식으로 경찰에 붙잡혔다. 이 회장은 지난 8월 초 검찰수사 도중 잠적, 석달 넘게 도피생활을 해왔다. 검찰은 회사 돈 570억원을 횡령했거나 가로챈 혐의로 이 회장을 공개수배한 바 있다. 이 회장은 이 돈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정관계 유력 인사들에게 전방위적인 로비 의혹을 받고 있다.
도주 기간 동안 그의 근황을 둘러싸고 해외출국설, 중국 밀항설, 신변 이상설, 자살설 등 갖가지 설이 난무했다. 하지만 이 회장이 경찰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면서 그 배경을 비롯해 이후 몰아칠 후폭풍에 정치권과 공직사회의 촉각이 곤두선 상태다.
박 대통령은 지난 16일, 엘시티 사업에 측근 인사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면서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관련자들을 엄단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엘시티 사업에 대통령 측근 인사가 개입돼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며 “박 원내대표의 의혹 제기는 근거 없는 정치공세”라고 강조했다.
앞서 박 위원장은 이날 오전 국회 비대위서 “건설사가 수주할 때에는 시장조사와 타당성을 조사해 결정한다”며 “그런데 포스코건설서 10일 만에 보증채무가 이뤄져 전광석화처럼 작업이 진행됐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박 위원장은 “포스코에 그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대통령과 가장 가깝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정치인”이라며 “이 정치인이 개입했다는 제보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은 또 하나의 최순실 게이트라고도 했다.
엘시티 사업은 16개 금융기관서 2조원에 가까운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을 받아 정권 실세가 관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은 대형 부동산 개발 등 위험이 큰 대규모 사업에 주로 사용되는 자금 조달 방법으로, 금융사가 업주의 신용이나 담보물의 가치보다는 사업 자체의 경제성을 믿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말한다.
야권은 즉각 반발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주) 박경미 대변인은 국회 브리핑서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에 대해) 당연히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하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서도 “박 대통령에 대한 퇴진 요구가 거센 상황에서 철저한 수사와 연루자 엄단을 지시한 것은 어불성설이자 가당치 않다”고 비판했다.
또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사태로 검찰조사에 응해야 할 대통령이 누구를 엄단한단 말인가”라며 “정치적 저의가 매우 의심스럽다”고 했다.
국민의당 손금주 수석대변인은 “전형적인 물타기이자 공안정국을 조장, 퇴진 국면을 전환하려는 꼼수”라며 “박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거슬러 공작 정치를 발동하려 하지 말고 겸허히 검찰 수사를 받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박 대통령의 엘시티 수사 지시가 ‘최순실 게이트 물타기’라고 주장하는 야권의 비판에 청와대는 “근거 없는 의혹 제기에 대한 혼란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재차 주장했다.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에 야권과 청와대가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대권주자 두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와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다.
김 전 대표는 지난 17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서 “현 시점에서 엘시티 비리 의혹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박 대통령과 대척점에 섰다.
그는 “엘시티 비리 의혹과 관련해 청와대가 개입돼 있다는 주장을 두고 관여가 없다는 걸 강조하다 보니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며 “압박받을 사람은 받는 것이고 압박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은 받을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표는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자 허위사실 유포·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루머 유포자들을 고소했다.
문 전 대표 역시 엘시티 연루설을 퍼트린 유포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문 전 대표는 “지난 대선 당시 십알단(십자가 알바단)이나 댓글부대와 같은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이런 식의 흑색선전이 더 이상 대한민국 정치와 선거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대응하고 발본색원해 나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문 전 대표의 엘시티 사업 비리 연루설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이하 박사모)’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었다.
더민주 조한기 의원은 SNS에 “십알단이 부활하고 박사모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며 “(박사모가) ‘엘시티 문재인’ 실검(실시간 검색) 2위까지 올리고 1위로 올리겠다고 자랑한다”고 적었다. 조 의원은 박사모의 한 회원이 홈페이지에 “이제 검색어에 엘시티 문재인 같이 연결돼서 순위 오르고 있읍니다”라고 쓴 인터넷 화면 캡처를 함께 게재했다.
화면 캡처에는 “더 검색하세요. 댓글도 다시고 엘시티로 보수는 집결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박사모 측은 제기된 논란에 강경 대응하겠다고 나선 상태다. 박사모 정광용 중앙회장은 “대한민국 박사모 회장으로서 경고한다”며 “박사모 지도부는 루머와 관련해 조직적으로 움직인 바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관련 허위사실 유포자들을 법적 조치하겠다고 경고했다.
대권주자인 여야 전직 대표가 형사고발 등 허위사실 유포에 강경 대응하는 것은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이 게이트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엘시티 사업 비리 의혹은 공무원, 정치인, 국정원 전‧현직 간부까지 연루됐다는 말이 나오는 등 현재 거론되는 인물만 수십명에 달하는 대형 사건이다.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이 회장의 입에 눈과 귀가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엘시티 사업은 사업비만 2조7000억원 규모에 이른다. 해운대 해수욕장을 앞마당으로 하는 6만5394㎡ 부지에 101층 랜드마크 1개동과 85층 주거 타워 2개동이 선다. 6성급 레지던스 호텔, 워터파크 등도 들어간다. 포스코건설이 시공을 맡아 2019년 완공 예정에 있다.
엘시티 사업은 ‘특혜 범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곳곳에 의혹이 가득하다. 가장 크게 대두되는 의혹은 인허가 특혜 논란이다. 부산시, 해운대구, 부산도시공사 등이 사업 과정서 도시계획 변경과 주거시설 허용 등 사업계획 변경, 환경영향평가, 교통영향평가 등에서 각종 특혜를 몰아줬다는 의혹이다.
부산시는 2006년 엘시티 입지를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하고 2007년 주상복합 아파트를 포함한 공동주택과 오피스텔만 금지, 호텔·콘도를 비롯한 위락시설만 짓는 조건으로 민간투자자 모집에 나섰다. 부산도시공사는 이 회장이 대표로 있던 청안건설 등 20개 기업이 참여한 트리플스퀘어 컨소시엄(현 엘시티PFV)을 선정했다.
선정 과정서도 의문점은 있었다. 당시 3개 컨소시엄이 신청서를 냈는데 다른 두 개 컨소시엄이 70층 규모의 건축물을 설계한 것에 반해 엘시티는 117층 높이로 개발안을 내놨다. 일반 상업 시설만으로 구성된 100층 이상 랜드마크 건물의 사업성 여부에 시민단체도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규제를 하나씩 풀리면서 엘시티 사업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2008년 11월 해운대구의회가 옛 한국콘도 자리를 편입해 달라고 청원하자 부산시는 도시계획변경 절차를 밟아 승인했다. 이 덕분에 엘시티 입지는 5만10㎡에서 6만5394㎡로 31.8%가 늘어났다. 여기에 시행사 엘시티는 사업성을 문제 삼아 부지에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용도 변경을 요구했고, 부산시와 도시공사는 이 또한 들어줬다.
2009년 부산시 도시계획위원회는 해운대 해수욕장 인근 지역 난개발을 막기 위해 만든 해안경관 개선지침 규정을 변경했다. 원래는 중심미관지구와 일반미관지구로 지역을 이원화해 중심미관지구에는 건축물 높이를 최고 60m 이하로 규정하고 주거시설을 짓지 못하게 했다.
원래대로라면 엘시티 부지에 주거 타워는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시계획위원회는 해운대 해수욕장 인근을 일반미관지구로 일원화했다. 용도변경과 고도제한 완화로 엘시티 입지는 초고층 주거 타워가 들어설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환경영향평가도 면제받았다. 부산시는 ‘도시개발사업은 사업면적 12만5000㎡ 이상인 경우 환경영향평가를 받는다’는 조례를 인용해 6만5394㎡인 엘시티 사업의 환경영향평가를 면제했다. 그러나 엘시티의 연면적은 66만1134㎡로 사업 면적에 비해 매우 넓다.
환경영향평가는 사업 계획 수립 과정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미리 조사하고 예측, 평가해 해로운 환경영향을 피하거나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을 말한다. 엘시티가 해운대 해수욕장을 앞마당으로 둘 정도로 가까운 곳에 세워지는 만큼 부산시에서 자체적으로라도 환경영향평가를 진행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교통영향평가도 문제로 지적됐다. 교통영향평가는 교통의 수요를 예측하고 검토·분석해 교통 정책을 강구하는 것으로 건축물 신축 등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을 진행할 때 시행되는 제도다. 엘시티 부지에는 주거 시설, 호텔, 워터파크 등이 들어설 예정이었기에 교통량 증가는 당연했다.
하지만 부산시 건축위원회 산하 교통소위원회는 약식으로만 교통영향평가를 진행했다. 또 부산시는 온천사거리~마포 6거리 도로 폭을 15m에서 20m로 넓히는 공사를, 해운대구는 달맞이길 62번길 도로 폭을 12m서 20m로 넓히는 공사를 해주기로 했다.
입지 주변 도로 확장은 교통 유발 원인자가 부담하는 게 일반적인데 반해 시가 공사를 자처하고 나섰기에 이례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게다가 군인공제회와 BNK금융그룹 부산은행이 이 회장에게 수천억원대의 특혜 대출을 해줬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엘시티 시행사는 땅 매수비와 설계용역비 조달을 위해 2008년 군인공제회와 3200억원 규모의 대여 약정을 체결했다. 당시 엘시티 시행사는 대출금의 이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자금 사정이 나빴다.
군인공제회는 그런 사정을 배려해주듯 2011년 5월로 예정돼 있던 대출기한을 여러 번 연장해줬고, 같은 해 12월에는 대출금을 250억원 늘려주기까지 했다. 3000억원이 넘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황에서 대출기한을 연장해주고 추가로 돈을 더 대출해주는 상식 밖의 일을 한 것이다.
군인공제회는 2014년 10월에야 3550억원을 상환 받았다. 그나마도 대출이자 2379억 원은 면제해주고, 대출 원금에 100억 원만 더 얹어 받았다. 이자 2379억원은 고스란히 군인공제회의 손실이 됐다.
엘시티 시행사는 이 돈을 갚는 과정서 부산은행에 3800억원을 대출받았다. 문제는 이미 약 1800억원대 개인 채무가 있던 이 회장에게 부산은행이 뭘 믿고 4000억원에 가까운 돈을 대출해줬냐는 점이다. 부산은행은 담보도 없이 이 회장에게 돈을 빌려줬다.
의혹의 눈초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회장이 갖고 있던 약 1800억원의 빚은 과거 ‘부산 다대·만덕 택지전환 의혹 사건’으로 빌린 개인 및 법인 정산 채무다. 이 회장은 주택도시보증공사에서 빌린 자금 중 620억원과 이자 1200억원을 갚지 않았다.
‘부산판 수서사건’으로 불리는 다대·만덕 택지전환 의혹사건은 이 회장이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사들인 부산 사하구 다대동 임야가 뚜렷한 이유없이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택지로 전환된 사건이다. 이 회장은 당시 최소 1000억원의 시세 차익을 챙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택지 전환 과정에서 정관계 로비설, 압력설 등이 난무했다.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가 다뤄졌고, 이 회장은 검찰 조사가 시작되자 잠적해 2년간이나 수사망을 피해 도피 행각을 벌였다. 부산시 최고위층, 정치권 인사 등이 비리에 연루됐다는 소문은 파다했지만 2년 만에 자수한 이 회장이 의혹을 부인하면서 횡령 등 일부 혐의만 인정돼 집행유예 판결이 떨어졌다. 검찰조사 때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던 이 회장은 입이 무거운 ‘자물통’이라는 평을 받았고 엘시티 사업권을 따내면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최근 정국을 달구고 있는 최순실 게이트에 엘시티 사업이 맞닿아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불씨가 크게 타오를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 회장이 최순실씨, 언니 최순득씨와 함께 계모임에 가입돼 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중앙일보>는 계모임 운영자와 총무에게서 “가입한 시기는 차이가 있지만 이 회장, 최씨, 최씨의 언니가 계모임 계원인 것은 맞다”고 했다. 이 회장과 최씨 간의 연결고리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이 회장은 일단 계모임 계원이었던 사실은 인정했지만 최씨는 모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지난 17일, 세 사람이 가입했던 계모임 계주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이 회장이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570억원의 흐름에 대해 쫓고 있다. ‘일사천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술술 풀렸던 엘시티 사업에 고위급 인사가 개입됐다는 설이 흘러나오면서 그 돈이 로비 자금으로 쓰인 것은 아닌지 여부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한편 검찰은 이 회장이 조성한 비자금 중 절반가량은 사용처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자신과 가족의 부동산 취득, 개인 채무 변제, 생활비, 차명회사 운영비 등에 돈을 썼다고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