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연재]‘레드모델바’ 김동이 대표의 <여자의 밤을 디자인하는 남자 11>

2010.12.14 09:43:01 호수 0호

‘화류계’ 에이스, ‘연예계’ 별을 품다

전국 20여개 지점을 가지고 있는 국내 최고의 여성전용바인 ‘레드모델바’를 모르는 여성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현재 레드모델바는 기존의 어두운 밤 문화의 하나였던 ‘호스트바’를 건전하게 바꿔 국내에 정착시킨 유일한 업소로 평가받고 있다. 이곳에 근무하는 ‘꽃미남’들만 전국적으로 무려 2천명에 이르고, 여성들의 건전한 도우미로 정착하는데 성공했으며 매일 밤 수많은 여성손님들에게 생활의 즐거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성공의 배경에는 한때 ‘전설의 호빠 선수’로 불리던 김동이 대표의 고군분투가 녹아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과 유흥업소의 창업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여자의 밤을 디자인하는 남자>를 펴낸다. <일요시사>는 김 대표의 책 발행에 앞서 책 내용을 단독 연재한다.

“안녕하세요? 여긴 세원 매니지먼트라는 기획사입니다”
장 대표는 나를 보자마자 ‘전속 계약서’를 쓰라고 했다


■ 다시 일상으로
그렇게 나는 6개월간 다시는 화류계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쓰라린 과거의 기억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고, 화류계가 아니어도 근근이 먹고 살 수 있을 듯 했다. 비록 예전처럼 ‘왕자’로 살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은영씨, 명자씨와 있었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소박한 거지의 삶도 괜찮은 듯 싶었다.
하지만 지갑에 1000원짜리 몇 장이 달랑거릴 때는 옛날 생각이 나기도 했다. 하룻 밤만 나가도 수십만원씩 벌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백마담에게 전화만 하면 언제든지 바로 달려오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하루에 4~5개 테이블을 보는 나름 ‘에이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으리라는 내 결심을 또다시 뒤바꿀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통의 삐삐가 찍혔다. 낯선 번호였다.
“안녕하세요? 김동이씨, 여긴 세원 매니지먼트라는 기획사입니다.”
모델 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그간 수많은 기획사에 나의 프로필을 돌렸기 때문일까.
“저희 대표님이 좀 보자고 하시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기획사 대표가 보자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모델이나 배우로서 나에게 관심이 없다면 연락이 올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다음 날 10시에 약속을 잡고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솔직히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가슴속엔 희망이 넘실대고 있었고 새로운 꿈이 생겨났다.
그렇게 잠 못 드는 밤이 지난 후 다음 날 해가 밝았다. 미팅 시간은 오후 3시였지만 나는 오전 10시부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부산스럽게 구두도 닦아놓고 어떤 옷을 입을지 이것 저것 꺼내보기도 했다. 다림질도 정성스럽게 했다. 매니지먼트 대표와의 만남이 나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버스에 올라탔다. 늘 타고 다니는 버스지만 오늘만큼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달라보였다.
‘이제 이 사람들이 나를 TV에서 볼 수 있겠지? 그럼 나는 가난했던 무명시절을 떠올리며 저는 늘 그 당시엔 버스를 타고 다녔어요, 라고 말할 수 있겠지?’
이미 성공한 듯 싶었다. 벌써 내 마음만큼은 스타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어느덧 기획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 내부에는 유명 배우들의 대형 브로마이드 사진이 걸려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드디어 사장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장 대표’라는 분은 흰색 와이셔츠에 머리를 올백으로 넘겼다. 커다란 책상 뒤에 앉은 그는 마치 우리나라 연예계를 쥐락펴락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만큼은 최소한 그가 나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대표님이 위아래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사진에서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낫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리고 새로운 포부
그 분은 성격도 화통하신 것 같았다. 미래의 스타를 알아보는 심미안이 있어서인지 나를 보자마자 직원을 따라 가서 ‘전속 계약서’를 쓰라고 했다. 직원이 계약서에 대해서 이것저것 설명해주고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내일부터 연습에 들어간다고 했다. 대본까지 주면서 내일 4시까지 사무실로 오라는 것이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 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전속이 되면 전속 계약금 같은 것도 주고 그러지 않나? 내가 신인이라 나중에 주려고 하나?’
하지만 어쨌든 당시에 전속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확실하게 책임을 지고 밀어주겠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계약을 마치고 사무실 밖으로 나오자 여의도가 모두 내 땅으로 보였고 방송국에 들락거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옛날 일이 생각났다. 강원도에서 모델의 꿈을 안고 상경했던 그 시절이 생각났다. 단돈 50만원을 들고 상경했던 그 시절. 보증금 20만원에 월세 8만원 짜리 강북 석관동의 달동네에 살던 그때. 연탄 100장을 사놓고 라면 5박스를 챙겨 놓으며 가슴이 뿌듯했던 그때의 고생들이 이제는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으로 생각됐던 것이다. 호빠 시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렇게 힘든 세월을 거치면서 성공하는 거 아니겠어? 눈물 없이 어떻게 성공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엄마 생각이 간절했다. 나이든 총각이 ‘엄마’라고 부르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라는 말이 더 좋다. 아픈 다리를 이끄시며 화전밭을 일구시던 엄마. 10kg짜리 콩 한말을 시장에 가져가도 받는 돈은 1만5000원 밖에 안된다. 내가 서울에 간다고 하자 엄마는 그렇게 고생하고 힘들게 일을 해서 모은 돈 50만원을 선뜻 주셨다. 엄마가 사는 곳은 깡촌 중의 깡촌이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10여 가구가 전부인 곳이다.
엄마는 그렇게 고생스럽게 사셔도 내가 TV에 출연한다고 하면 너무도 즐거워하셨다. 물론 대부분 그저 1~2초 정도 출연할 뿐이었지만 그 시간이 엄마에게는 10분, 1시간으로 느껴지셨나보다. 강원도 산골에서 서울에 간 아들의 얼굴을 TV로 볼 수 있다니 엄마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도 많이 하시고, 대견해 하시기도 하셨다. 그런데 그럴수록 나는 오히려 더 시골에 가기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엑스트라, 대사도 없는 조연에 불과한 것을 과장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1~2초가 아니라 진짜로 스타가 될 듯 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전속계약이 됐다고 말씀드렸고 내가 가지고 있던 거창한 포부도  이야기를 했다. 이제 곧 성공해서 돈 많이 벌어 엄마를 모시고 살겠다고.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아들이 엄마를 호강하게 해드리겠다고 굳건히 약속을 드렸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것보다는 아들 하나 잘되는 게 더 중요한 듯 싶었다.
“그래, 장하네, 우리 막내. 그래도 몸 하나 아프지 않은 게 제일이야. 어디 가서라도 나쁜 짓 하지 말고 늘 겸손하게 잘해.”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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