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몽키하우스’ 미군 위안부 수용소 (18)고요한 농촌이 조악한 유흥가로

2026.03.23 05:04:56 호수 1576호

“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아, 색깔은 어찌 아다지도 사람의 마음을 한순간에 현혹시키는 것일까? 저건 사람이 만들어 매달아 놓고 끄며 껴는 하나의 물건일 뿐인데…사람 마음을 홀리는 도깨비불 같은 요소가 있어. 아마 일단 저 속으로 들어가면 홀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안 홀린다고 뻐기는 건 어린애 같은 자기기만일 뿐이야. 흠,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어. 홀리려고 들면 홀리는 척하면 되지. 부처님도 색즉시공이라 했다던데…흐, 그래도 저 색깔은 참 묘하군.’

애욕의 향연

청운은 생각에 잠겼다.

“야, 뭐해? 어서 들어와!”

피에로의 목소리를 듣고 청운은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영업이 시작되기 전이라 홀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바로 이곳에서 어젯밤의 그런 광란과 애욕의 향연이 펼쳐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피에로는 카운터 쪽으로 급히 걸어가더니 공손스레 고개를 숙였다.

“아 지배인님, 벌써 나오셨습니까? 헤헤, 어제 말씀드린 동생을 데려왔습니다.”

“그래?”

얼굴이 거무스름하고 고무질처럼 질겨 보이는 중년 남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배인님이니 인사 드려.”

피에로가 팔꿈치로 청운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청운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흠, 얼마나 버틸진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해봐. 엿장수 저놈의 뽄달가진 따라가지 말고.”

지배인은 고개를 돌리곤 카운터 앞에 앉은 얼굴이 하얀 여자와 뭔지 쑥덕거렸다.


“제가 뭘 어쨌다고.”

“꺼져, 임마!”

“볼일 봤으니 가야죠 뭐, 헤헤.”

피에로가 미꾸라지처럼 움직였다. 청운은 한 발짝 한 발짝 홀 안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그곳은 동굴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어쩐지 원시인들의 동굴 같은…시멘트로 지은 동굴.

분홍색으로 도배한 벽에 미러볼이 비쳐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나 실상은 철골과 콘크리트로 급조된 삭막한 건물일 터였다.

원래부터 이런 곳이 아니라, 미군 기지가 들어서자마자 고요하던 농촌 마을이 갑자기 조악한 유흥가로 변해 버린 것이리라.

‘아마 그랬겠지. 순박한 처녀든 굴러먹던 논다니든, 미군을 보곤 얼마나 놀랐을까. 하얀 도깨비나 검은 도깨비를 만난 심정이 아니었을까. 같은 인간으로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도 아니고…엄청난 몽뚱이 밑에 깔려 야윈 다리를 벌려야 한다면…같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사악한 괴물과 섹스를 해야 한다면…물론 잘난 미군들 입장에서는 한국의 여자들이 사람 닮은 짐승이나 이상야릇한 소녀 악마로 보였을 수도 있겠지.’

청운은 씩 웃었다.


‘어쨌든…만일 약자가 아니라면 누가 자기 몸을 도깨비에게 팔겠는가? 도깨비 방망이를 만지고 받아들여 잘 합궁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꿈꾸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몸이든 맘이든 많이 아팠을 거야.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변질돼 버리고.’

“구름아, 바람 따라 좀더 산천 구경하면서 천천히 오거래이.”

저쪽에서 피에로가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바삐 오라고 흔들어댔다.

시멘트로 지은 동굴에 들어가니…
누가 자기 몸을 도깨비에 팔겠나?

청운은 홀을 가로질러 그쪽으로 갔다. 카운터 앞에 은테 안경을 쓴 여자가 앉아 있었다. 작은 눈이 슬쩍 청운을 쏘아보았다.

희멀건 둥근 얼굴이었지만 루주를 짙게 칠한 작은 입술이 모종의 매력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뒤쪽의 유리 진열장 안에도 맥주와 양주를 비롯해 갖가지 음료수 류가 구비돼 있었지만 그 옆쪽에도 캔이나 과자봉지 따위가 줄느런히 쌓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청운이 인사했지만 여자는 더 이상 고개를 들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했다.

“가자, 이젠 창자를 관통해서 입 밖으로 나가는 거야. 히힛.”

피에로가 말했다.

“뭐라구?”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뭘…입이나 똥구멍이나…히히힛.”

별것 아닌 농담이었다. 좀더 가자 홀의 열린 문을 통해 흐린 하늘이 바라보였다. 그쳤던 눈이 또 내려 하얀 주렴을 만들고 있었다. 밖으로 나서서 쳐다보자 ‘블루문’ 간판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곳이 입구였던 것이다.

“좀 있으면 미국 녀석들이 물밀 듯이 몰려올 거야. 다섯 시에 퇴근하거든.”

피에로가 말했다.

“형, 저기 저렇게 걸어다니는 여자들을 보니까…… 왠지 시골 논의 물방개나 소금쟁이 녀석들이 생각나.”

“뜬금없이 뭔 소금쟁이냐.”

“흐흐, 왠지 모르겠어.”

“싱겁긴.”

하기야 어둠이 점점 짙어지고 네온사인 불빛이 현란해지자 길을 걷는 사내가 여자들의 몸이 색채에 휩싸여 조각나 보이기도 하고 영혼이 바닥에 떨어져 기어다니는 듯싶기도 했다.

청운으로서는 새로운 세계로의 입문(入門)이라면 입문이었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예사롭잖은 고생을 겪은 청운은 겉으론 별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는 성싶었다.

‘흐…어떤 곳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만…이런 곳에서 생활하게 될 줄은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지. 만일 피에로 형이 아니었다면 평생 동안 이런 델 와 볼 기회나마 있었을까? 혹시 이야기로 들을 순 있었을진 몰라도 직접 발을 들여 놓긴 어려웠을 거야. 흐흐…돈 많은 사람들은 세계 각국을 유람하면서 진귀한 곳을 찾아다닌다는데…내가 발 딛고 사는 땅에 있는 요지경을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지.’

청운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찰싹 때렸다.

‘흐흐…피에로 형과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과연 내가 여기 오지 않았을까? 운명이라고 하기엔 좀 칠칠맞고…그 어릿광대 같은 형의 손짓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 깃든 어떤 욕망으로 여기 와서 머물게 된 게 아니겠느냔 말야.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모종의 욕구와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빙글빙글 돌아가는 미러볼의 오색 불빛 속에 녹아들어 스스로 유혹하고 유혹당하는….’

작은 희망

청운은 의외로 바삐 뛰어다녀야 했다. 그의 직책은 청소 따위를 맡아 하는 일종의 잡부였으나, 한밤중 홀이 한창 바쁠 때는 서빙을 돕기도 하고 주방 보조로 잠시 일하기도 했다.

바깥 하늘에선 별이 빛나고 홀의 천정에서 거울 공이 돌아가고…. 다행히 부상당한 다리의 상태는 많이 좋아지고 있었다.

아직 조금씩 절뚝거리긴 했지만 거의 표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면 이전의 건강하던 다리로 회복될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가져볼 만도 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저작권자 ©일요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Copyright ©일요시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