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LPGA 투어에서 통상 ‘베테랑’으로 불리는 28세, 성은정은 이 나이에 ‘루키’로 출발선에 선다. 174㎝의 압도적인 피지컬로 아마추어 무대를 호령하던 그가 기나긴 입스를 떨쳐내고 9년 만에 시드권을 따내면서다. 성은정은 지난 10일 언론 인터뷰에서 “포기하지 않고 이 자리에 선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며 “갓 취업한 신입의 마음으로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여자골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아마추어 중 한 명이었다. 국가대표로서 거둔 우승만 22회, 2016년에는 US여자 아마추어 챔피언십과 US여자 주니어 아마추어 챔피언십을 싹쓸이했다. 그는 “골프는 열심히 하면 당연히 잘되는 것인 줄 알았다”고 돌아봤다.
이겨내고
영광의 정점에서 악몽이 찾아왔다. 2016년 KLPGA 투어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 초청 선수로 출전한 성은정은 ‘대세’ 박성현과 챔피언조에서 경기하며 3타 차 선두를 달렸다. 하지만 마지막 18번 홀에서 트리플보기를 범해 연장으로 끌려갔고, 오지현에게 역전패당했다. 당시엔 2등 한 것도 잘한 일이라며 자신을 다독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씩 그날의 악몽이 성은정의 안에서 자라났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엡손투어(2부)에서 프로로 데뷔해 승승장구했지만 시즌 막바지 드라이버샷이 흔들렸고, LPGA 투어 출전에 실패했다. 그러면서 드라이버 입스가 본격적으로 그를 집어삼켰다.
성은정은 “드림투어(2부)에서 뛴 2021년부터 3년간 경기한 게 고작 20여일 정도였을 만큼 최악의 암흑기였다”고 회상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잘하지 못하는 나’였다. 골프가 인생의 전부였기 때문에 필드에서의 실망과 열패감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그에게 위로와 희망을 건넨 것은 지난해 마스터스 대회에 출전한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다. 인생에서 가장 간절한 무대, 마지막 홀의 실수로 무너진 매킬로이를 보며 “지금 자신이 얼마나 싫을까”라며 동질감을 느꼈고, 끝내 일어서서 우승을 거머쥐는 모습에 함께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성은정은 “실패하는 나도 나라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며 빙그레 웃었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골프 레슨도 뜻밖의 치료제가 됐다. “다른 사람에게 골프를 가르치면서 다양한 시각으로 고민하다 보니 그동안 ‘나의 골프’에 갇혀있던 틀을 깰 수 있었죠.”
9년을 돌아와 드디어 얻은 루키의 자격, 성은정은 ‘요리를 잘하는 선수’를 꿈꾼다. “제가 생각한 대로 샷이 풀리지 않으면 그날 하루를 다 망치곤 해요. 이제는 안되면 안되는 대로, 되면 되는 대로 샷을 메이킹해서 재미있게 치고 싶어요.”
여자골프 사상 최고의 아마추어
9년 슬럼프 딛고 시드권 따내
올 시즌 가장 욕심나는 대회는 8월 열리는 BC카드·한경KL PGA챔피언십이다. 그에게 가장 큰 영광과 상처를 준 바로 그 대회다. 올해부터는 명실상부한 메이저 대회로 승격됐다. 그는 “포천힐스CC에서 제 인생의 또 다른 터닝포인트를 만들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그의 부모는 운동선수 출신으로 딸의 성공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 주니어 시절부터 해외 대회에 비즈니스석에 태워 보낼 정도였다. 성은정은 “대단히 고맙다. 그러나 엄마 아빠가 나를 골프 선수 말고 그냥 평범한 딸로도 대해줬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초 독립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일반인 대상 레슨도 했다. 부모님과 성은정 자신까지 3명이 쫓아다니며 노력해도 힘들었는데,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혼자 하니 오히려 문제가 풀렸다. 성은정은 “마음이 편하고 온전히 집중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 주위에선 부모님이 내게 부담을 준다고 했는데, 돌아보니 내가 나에게 부담을 준 거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올해 스코티 셰플러의 인터뷰 내용을 곱씹어봤다. ‘골프 실력보다 중요한 건 훨씬 더 많다. 삶의 궁극적인 만족과 정체성을 성적이나 성공에서 찾지 않겠다’고 하더라. 대회장 나갈 때마다 못 치면 어떡하지 불안했는데 이제는 못 친다고 ‘누가 죽나’라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성은정은 “레슨하면서 좋은 분들도 알게 됐다”고 했다. 부모 바깥의 다른 넓은 세상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슬럼프를 이겨내고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몸 관리 덕이라고 여긴다. 그는 “괴로워서 술을 마실 때도 있었지만 일주일에 두세 번씩, 많게는 15㎞를 달린다. 내가 내딛는 발자국 소리가 좋고 그 템포에 몸을 실으면 마음이 안정된다”고 했다.
다시 도전
성은정은 “과거엔 최고 장타자라고 칭찬 들었는데 요즘 나보다 멀리 치는 선수들이 많더라. 어릴 때 언론에서 내 장기가 드라이버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다. 사실 내 장기는 드라이버가 아니라 아이언”이라고 했다. 집착하지 않으면 드라이버와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아울러 “답을 찾기 어려울 때 잘 모르던 KPGA의 최진호 등을 찾아가 도움을 받았다.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성은정은 말했다. 어머니와도 화해했다. 그는 “요즘 어머니는 골프 라운드를 많이 하신다. 그래도 나를 보고 ‘오늘 왜 보기를 했느냐’고 묻곤 하신다. 그런 거 보면 엄마는 아직도 골프를 모른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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