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청운은 문득 놀랐다. 무대 위에서 붉은 빛을 흩뿌리며 춤추는 댄서가 아까 길을 안내해 준 ‘붉은 여자’ 같았던 것이다. 화장을 진하게 한 하얀 얼굴과 붉은 빛이 도는 긴 머리카락….
붉은 여자
청운은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살펴봤으나 곧 커다란 미군들이 무대 앞으로 바짝 다가들어 광란적으로 함께 춤추기 시작했기 때문에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청운이 맥주를 마시고 잔을 탁자에 놓는데 어떤 이상스런 사내가 다가와 섰다.
“손님, 여긴 한국인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이방인은 여기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한국 사람이 이방인이라구요?”
청운은 놀라 반문하며 사내를 쳐다보았다. 중절모를 쓰고 눈이 엄한 빛을 띠었으며 코 밑에 히틀러 같은 수염을 달고 있었다.
검은 윗도리의 소매가 좀 짧아 손목이 드러난 팔에 필살 무기인지도 모를 지팡이를 건 모습이었다.
“손님, 저급한 민족은 강하고 고급스런 종족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뜻과 달리 추방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는 단일민족이 아니라 단일한 이념과 생각에 의해 하나의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만이 지구에 존재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아름다운 나라…혹시 미국?”
“네, 맞췄습니다. 헤헤….”
사내가 미소를 짓자 엄숙하던 히틀러의 얼굴이 서서히 해학적인 채플린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주름살과 앞니 빠진 모습 때문이랄까.
“그럼 답을 맞춘 상으로…여기 앉아 주지육림을 즐기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군인들을 눈앞에서 생생히 구경하는 특권을 드리겠습니다.”
“피에로 형, 연기를 꽤 잘하는걸.”
“벌써 눈치챘니?”
“긴가민가하면서 속아 주는 척한 거지 뭘.”
“짜식이…이 위대한 미래의 대배우를 무시하면 안 된다구.”
“아냐, 정말 깜짝 놀랐어.”
“괜찮아. 내가 아무리 채플린을 좋아한다고 해도…. 어찌 짝퉁 배우가 인생의 목표겠냐. 나도 모방이 아닌 나만의 조선 방랑자를 창조해 내고 싶어. 꼭 그럴 거야.”
강하고 고급스런 종족의 지배
“아름다운 나라가 혹시 미국?”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그래서 코리아 피에로의 한 많은 목소리와 몸짓으로 선감도 수용소의 비극을 보여 주고, 이 특이한 이방 지대의 이야기도 조선 어릿광대의 눈으로 보고 들려 주면 관객들은 감동을 받을 거야. 나중에 내가 또 스릴 넘치는 체험을 얘기해 줄게.”
“뭔데? 무척 궁금한걸.”
“나중에 천천히…그건 그렇고 무대 위에서 춤추는 저 여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미국 녀석들 혼을 흔들어 주고 있구먼.”
“히히, 아주 홀딱 빼놓기도 하지. 좀 있으면 특별 쑈를 시작할 테니 앉아서 구경해. 그 다음에 내가 무대에 설 차례라 미리 가서 준비를 좀 해야 하거든. 재미없더라도 비웃지나 말고 나중에 충고해 줘.”
“응, 알았어. 잘해!”
피에로는 특유의 미소를 짓곤 서둘러 사라졌다. 그런 와중에도 지팡이를 슬슬 흔들며 발이 삐딱삐딱 꼬이는 우스꽝스런 걸음을 연습하고 있었다.
‘꿈을 위해 건배!’
청운은 혼잣소리로 중얼거리곤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홀과 무대 위의 모습이 유리잔의 볼록한 한 면에 축소되고 응집돼 비쳤다. 붉은 무희의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 춤옷에 달린 무지갯빛 구슬들이 서로 교차하며 앙증맞게 반짝였다.
청운은 어릴 때 술에 취한 아버지가 보여 준 만화경이나 요지경 속의 모습을 감상하듯 가만히 주시했다. 그녀는 신비로운 비밀을 지닌 동화 속의 인형 같았다.
어느 결에 악단의 연주가 고즈넉하고 애조 띤 음조로 바뀌었다. 휘황하던 조명이 흐릿해졌다.
무대 앞 플로어에서 광적으로 몸을 흔들어대던 거대한 사내들이 하나 둘 자리로 돌아가 앉아 술을 마셨다.
부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여자들 중에 제 취향에 맞는 아가씨를 꿰어 찬 채.
사람의 얼굴을 가진 그 나비들은 향기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끌려 살포시 앉았다.
진홍의 무희는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고 석상인 양 가만히 서 있었다. 언젠가 제주도의 외딴 바닷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검붉은 석회암 인어상 같았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이 악단의 연주가 은은하면서도 퇴폐적인 음조로 바뀌자 진홍의 무희는 쭉 빠진 몸매를 감질나게 흔들며 미소지었다.
무대 위의 조명은 이미 어둑하게 바뀐 가운데 찬란한 무지갯빛이 빙글빙글 돌며 그녀에게로만 비쳐 어느 천상계의 선녀 같아 보이게 했다.
꽃뱀처럼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던 그녀는 슬며시 춤옷 윗도리를 벗어 옆으로 내던졌다.
상체를 슬쩍 비틀자 망사 브레지어에 감싸인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위쪽을 향해 솟은 도발적인 유두가 견디다 못한 양 비어져 올랐다.
어디선가 쩝쩝 하고 빨아대는 소리가 났다. 술잔을 빠는지 옆에 앉은 여자의 입술이라도 빠는지….
무희는 애조 띤 한 줄기 트럼펫 소리에 따라 느릿느릿 몸을 꼬면서 아랫도리 허울마저 벗어 내렸다. 팔등신의 매끄러운 몸매가 에로틱하게 꿈틀거리자 여기저기서 괴성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달러 또는 군표로 접은 종이 비형기가 무대를 향해 막 날아갔다.
맥주병을 입으로 가져가 꿀꺽꿀꺽 마신 어느 흑인은 병 입구에 입김을 휘휘 불어 애잔한 곡조를 자아내더니 그 맥주병 주둥이가 옛 고향 애인이라도 되는 양 쪽쪽 빨아댔다.
퇴폐적 무희
잠시 후 막이 다시 열리고 무대 위엔 위대한 미래의 대배우 피에로가 등장했다.
막이 열렸다기보다 피에로 스스로 살며시 젖히고 상체를 내민 뒤 구멍 속의 쥐새끼처럼 이쪽저쪽 둘러보다가 불쑥 튀어나왔다는 게 사실에 가깝긴 하지만….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