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몽키하우스’ 미군 위안부 수용소 “코쟁이한테 몸을 팔라고?”

  • 김영권 작가
2025.12.22 03:15:55 호수 1563호

“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청운은 술을 쭉 들이키곤 위악적으로 이죽거렸다.

여자는 발끈하더니 바락 성을 냈다.

“흥! 아무리 몸 팔아 먹고 사는 신세지만…… 그런 양갈보하구 비교한다면 기분이 상당히 드럽지. 내가 아무리 비루먹은 국내산 똥개 놈들하구 붙어 연명하는 똥치래두 말야, 징그러운 코쟁이 놈들한테 헤닥거리며 몸을 팔곤 싶지 않아.”

삶의 종착역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다 좋아서 그러고 살겠어. 인생사,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것도 있을 텐데…….”


“흥, 거긴 화대가 꽤나 쎄긴 쎄다더군. 그러니 뭐 양놈 돈 보고 그 소굴에 들어간 거지 뭣 땜에 그랬겠어. 천만금을 준대도 난 그런 곳은 싫어.”

여자는 소주를 쭉 들이켰다.

그녀의 얼굴은 화장을 진하게 해서 그렇지 실은 나이가 제법 들어 보였다.

하기야 젊고 팔팔한 시절이라면 낡은 외진 구석에서 움츠려 있을까.

하지만 청운은 내색하지 않았다.

상대가 젊은 티를 내면 젊은 마음으로 대하면 되고 늙은 척하면 그냥 그렇게 받아 주고 싶었다.

웃고 있지만 내면에 박인 고독한 인상 때문인지 몰랐다.

혹시 저 여자는 이 궁창을 삶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청량리 588보다 더 먼 그 미군 기지촌을 미지의 지옥이라고 생각해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청운은 무심결에 웃었다.


“뭘 그 따우로 웃어, 기분 나쁘게스리.”

“이 세상은 과연 살만한 가치가 있을까? 하루하루가 쾌락의 날인 사람들도 많겠지만…… 시시각각이 괴롭고 허망스런 인생이라면…….”

“한창 땐데 괜히 엄살이야.”

이번엔 여자가 웃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잖아. 대학생이든 가난한 공장 품팔이든…… 어느 때나 어느 곳이나 젊은 사람들이 항상 많이 죽어 온 것 같아. 타살이든 자살이든…… 비밀스레 죽어 사라지는 사람도 많고…….”

“쳇, 뭘 그렇게 삼각한 눈으로 말하구 그래? 자 한잔!”

창녀는 술잔을 들어 청운의 잔에 쨍 부딪치곤 천천히 음미하며 들이켰다.

그러더니 문득 감상적인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아, 먼 남쪽 고향으로 가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나도 그런걸. 하지만 난 어딘지 몰라서 가보고 싶어도 못 가는 신세…….”

“그렇구나. 그런데 다리는 왜 절어? 찔레 언니 말로는 순수한 어린 왕자라던데, 응?”

“그 누나도 참 허풍쟁이로군. 순수는 무슨…… 내가 이래봬도 인생의 쓴맛 짠맛 다 맛본 사람이라구. 누나들보다 더 한이 많은 인간일 수도 있다구.”

청운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칫, 까불구 있어.”

시시각각 괴롭고 허망스런 인생
가난이 사람 일생을 바꿔 놓다

여자는 눈을 살짝 흘겼다.

“정말이야. 한번 들어 보실라우?”

청운은 히히 웃고 나서, 코흘리개 때 엄마한테 버림받은 후 거지가 되어 청계천 바닥을 떠돈 일부터 시작해 누명을 쓰고 선감도에 잡혀가 고생한 사연 등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악마산이나 북파공작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아휴, 불쌍해라. 어린 것이…… 그래두 이년의 가련한 신세에 비할까 보냐.”

여자는 투명한 소주를 꼴깍꼴깍 마시고는 마치 무슨 파란만장한 인생 대결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체험담을 슬슬 꺼냈다.

“가난…… 가난이 사람의 일생을 바꿔 놓을 수 있다고 말하면, 아마 돈 많은 갑부뿐만 아니라 요령 좋은 정치가 분들이나 사기꾼과 도둑놈들은 비웃겠지만…… 내겐 사실이었어.”

“흠, 내 인생도 그럴지 모르는걸 뭐. 모정(母情)보다 더 강한 가난이랄까. 아버지하구 트러블은 좀 있었지만, 만일 궁핍하지 않았다면…… 아마 엄마가 어린 자식을 내버리진 않았을 텐데…….”

여자는 술잔을 들어 쭉 비웠다.

“난 친아빠는 모르구 의붓아비만 알아. 엄만 시장 길가에서 과일 장사를 하다가 그 남자를 만났지. 썩은 사과 나부랭이로 허기를 달래거나 굶는 날이 더 많았던 시절…… 그래서 삼각지에 있는 어떤 집에 들어가 살게 됐어. 계부는 손 하나가 의수였지만, 미군부대 군속이라 벌이는 괜찮았던가 봐. 하지만 술고래에다 주정이 심해 때론 배고팠던 과거보다 힘겨웠어…… 언젠가부터 엄마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양키 물건 장사를 시작했던가 봐. 계부를 통해 빼돌린 미제들을 암시장에다 파는 거지. 달러에 미쳤는지 딴 놈팽이에 미쳤던지, 엄마는 서울을 벗어나 의정부나 동두천 기지촌까지 드나드는 모양이었어. 하루 이틀 사흘씩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지. 그런 무렵이면 엄마는 ‘아빠 밥상 잘 챙겨줘’라고 뇌까리곤 했지…… 그때가 아마 열두어 살쯤 됐을 거야. 어느 날 밤, 밥보다 반주를 더 흡족히 마신 양아비는 트럼프 카드를 꺼내 갖가지 마술을 보여 주며 내 눈을 홀렸어. 그리고 미국에서만 나오는 신비스런 넥타라며 검푸른 병에서 음료수를 한잔 따라 주었지. 난 홀짝 마시고는 헤롱헤롱 정신이 나가 버렸던가 봐. 완전히 뻗어 버린 건 아니었지만 제정신을 잃은 몽롱한 상태였어. 양아비는 귀신처럼 웃으며 여윈 내 소녀의 몸과 영혼을 강간했지. 후훗…… 그놈이 누군지 알아? 먼 일제시대엔 일본군 정보원 노릇을 하다가 해방 후엔 미군의 끄나풀이 된 자식…… 놈은 그 뒤에도 계속 내 몸을 유린했어. 난 거부하고 싶었지만…… 만약 엄마한테 알리면 다시 길바닥으로 내쫓아 쫄쫄 굶주리게 하고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협박했기 땜에…… 어쩔 수가 없었어. 사실은 한두 번 엄마에게 슬쩍 귀띔을 하기도 했었지만…… 별일 아니라면서, 새아빠 말 잘 들으라며 눈을 흘기는 바람에 한숨만 짓고 말았지.”

여자는 쓸쓸한 모습으로 술을 들이켰다.

“흐흐, 지옥은 우리가 모르는 어느 땅 밑에 있지 않아.”

청운은 우울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한데 나중에 의붓오빠라는 개새끼들까지 잭나이프와 혀로 위협하면서 강제로 몸에 올라타곤 지랄발광을 떠는 거야. 고딩 놈이 그러자 중삐리 새끼도 따라 히득거리며 좆을 들이대더군. 악당이라고 해야 할까, 정신병자라 해얄까? 내가 칼을 들고 결사적으로 막아도 그놈들은 슬쩍 물러나는 듯하다가 끈덕지게 덤벼들어 욕심을 채우곤 했어. 그 자식들의 엄마는 계부와 이혼을 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암튼 미국에 들어가 사는 모양이더군.”

“…….”

“아, 만일 친아버지가 제대로 살아 계시고…… 홀로 가난이 힘겹더라도 엄마가 계부 놈을 따라가지 말고 좀 견뎠더라면…… 이렇게까진 망가지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더 기막힌 일이 뭔지 알어, 응?…… 히힛…… 친아빠가 바로 그 음흉한 계부 놈한테 잡혀 죽었대.”

“뭐?”

쓸쓸한 지옥

“일제시대 말기에 우리 아빤 독립운동을 하신 청년이었대. 그러다가 일본군 밀정인 계부의 끈질긴 추적으로 결국 체포된 거지. 그동안 놈은 엄마를 매일같이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때론 달콤한 말로 꼬시기도 한 모양이야…… 해방되기 한 달 전에 감옥소에서 죽은 친아빠를 난 잘 몰라. 그때 난 겨우 서너 살이었고 아빠 얼굴을 한 번도 본 기억이 없거든. 이런 얘기도 사실은 좀 자란 후 술 취한 엄마가 주절대는 소릴 들은 거라 긴가민가해…… 아무튼 계부는 해방 후엔 일본군 대신 미군의 끄나풀이 됐고 6.25 전쟁 뒤부터는 한층 더 위세등등해졌지. 그 철면피는 아빨 죽인 것만으론 성이 안 찼는지 계속 엄마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는가 봐. 혹시 마타하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감시하는 척 도와주는 척하며 지분거리던 놈은 전쟁이 끝날 무렵 결국 엄마를 첩으로 만들어 버린 거야.”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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