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 이보시유. 선생은 저를 살려 주실라구 하늘이 보내신 분이 맞지요? 저도 알아요.”
“원, 별말씀을. 저 같은 자가 무슨 힘으로…….”
“아, 부탁합니다. 제발…….”
필사적 몸부림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부부는 한몸이랄까,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제발 저희를 살려 주시는 셈치고 방도가 있으면 알려 주십시오.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허, 사정이 딱한 줄 짐작하지만, 인간사 길흉화복을 어떡한단 말이오. 기도를 드려보는 게 좋을 게요.”
노신사는 슬그머니 일어서려는 동작을 취했다. 아버지는 다급히 소리쳤다.
“오오, 천사님! 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구 어떻게 그냥 가실라구 하십니까?”
“허, 이것 참…….”
노신사는 난처한 안색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러더니 곧 음성을 중후하게 바꿔 중얼거렸다.
“허허 참, 냉수 한 사발로 천기를 누설할 수도 없고…….”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 꼬깃꼬깃 감춰두었던 지폐 몇 장을 꺼내 와 노신사의 손에 쥐어 주었다.
“허허, 이거 이러자는 소리가 아닌데…… 아무튼 죽고 살고는 둘째치고 한 가지 물어나 봅시다. 사주가 어떻게 되오?”
“사주라고요?”
“그렇소.”
“예. 호랭이띠입니다.”
“호랭이라…….”
“네, 팔월 한여름에 났습니다.”
“흠, 더위 먹은 호랭이라…… 그랬군, 그랬어. 내 예감이 틀림없었군.”
한동안 손가락으로 육갑을 짚어 가던 노신사는 잔뜩 굳은 얼굴로 신음하듯 뇌까렸다.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버지가 되물었지만, 노신사는 계속 침묵할 뿐 더 이상 대꾸가 없었다. 엄마가 다시 몇 푼인가를 더 꺼내 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놀라지 않을 테니 제발 말씀해 주세요. 그게 어쨌다는 건가요?”
노신사는 비로소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는 지금 당신들의 절실한 간청에 감복하여 감히 신명을 어기고자 하는 바이오. 그에 따른 심정 고통이 엄청나다 해도 나를 원망치 마시오. 알겠소?”
“네, 여부가 있나요. 어서 말씀하세요.”
노신사는 헛기침으로 목청을 한번 울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아까 이 집 앞을 지날 때였소이다. 문득 웬 서늘한 기운 한 줄기가 내 이마를 타고 지나가지 뭐겠소? 급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더니, 웬 시커먼 먹구름 한 덩어리가 지붕 위에 머물러 있었소이다.”
엄마가 흠칫 놀라 지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쯧, 그게 아무 눈에나 보이겠소?…… 헌데 놀라지 마시오. 그 먹구름을 자세히 본즉 그건 다름 아닌 바로 독거미 떼의 운기더라 이 말이오.”
냉수 한 사발에 천기누설
먼 조상의 업보받은 아이
“뭐라구요?”
“커다란 독거미떼가 서로 엉켜 있는 형상의 운기…… 독거미가 늙은 호랭이를 파먹는 거외다.”
엄마의 안색이 백짓장처럼 핼쑥해져 갔다. 반면 아버지의 얼굴은 불그죽죽해졌다.
“헌데 그 수가 매년 한 마리씩 늘어나는 형세로 보아 이는 필시 나이를 가리킴이 분명한 터이오. 혹시 댁네 중에 현재 일곱 수의 아이는 없는지?”
“저 우리 용운이가 일곱 살인데…….”
“음…… 내 그럴 줄 알았지. 저 애가 태어난 건 언제요?”
“늦여름날…….”
“흠, 독거미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때로군. 바로 저 애요.”
“뭐라구요?”
“저 애가 바로 먼 조상의 업보를 받아 독거미의 살을 품고 태어났다는 거요. 지붕 위의 살기도 저 애한테서 뿜어나오는 것이고, 또한 그게 저 양반의 기혈을 빠는 중이라 이 말이외다.”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 안의 아버지가 힘겹게 지탱하던 상체를 이불 위로 무너뜨리며 폐부 깊숙이에서 무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허! 두렵고도 두렵도다…….”
노신사의 탄식이 꼬리를 길게 끌었다. 넋 나간 듯 서 있던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이제 우리는 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어떡하긴…… 호랭이와 독거미 중 한쪽이 죽어야만 다른 한쪽이 살지.”
아! 그 황당무계한 소리……
부모와 자식의 관계야 어찌 되건 말건, 한 가정의 운명이야 어찌 되건 말건, 그 터무니없는 괴담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내뱉을 수 있는 마음보는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정말 자기의 지혜와 철학에 그만큼 자신이 있어서였을까?
대체 어떤 무엇이 그런 황당무계한 철학에 그토록 자신감을 갖게 한 것일까?
어쨌건 그날부터 용운은 아버지로부터 느닷없이 미움의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건 살의까지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다음날 학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자 부엌에 있던 엄마는 그늘이 짙게 드리운 눈으로 용운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엄마, 왜 그렇게 쳐다봐?”
“아, 아니다. 어서 들어가 밥 먹어라. 배고프겠다.”
미움의 세례
엄마는 비로소 정신이 든 듯 밥상을 차렸다. 아버지의 표정은 더욱 괴이쩍었다. 엄마가 부축을 하고 미음을 떠넣으려는데도 입은 안 벌리고 계속 밥상 앞의 용운만을 노려보았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