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빈자들의 친구’ 프란치스코 발자취

2025.04.28 14:17:44 호수 1529호

평생 가난과 고통 함께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빈자들의 친구’이자 ‘개혁의 아이콘’으로 불린 프란치스코 교황이 88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청빈과 포용, 평화를 외치며 가톨릭의 틀을 깨고 약자의 곁을 지켰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화려함을 거부하고 ‘Franciscus’라는 교황명만 남긴 채 떠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1일(현지시각) 향년 88세로 선종했다. 2013년 제266대 교황으로 즉위한 그는 지난 12년간 전 세계 14억 가톨릭 신자를 이끌며 청빈과 개혁, 그리고 약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왔던 인물이다.

케빈 페렐 교황청 궁무처장 추기경은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전 7시35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셨다”며 그의 선종 소식을 전했다. 페렐 추기경은 “그는 삶 전체를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데 헌신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앙과 용기, 보편적 사랑으로 복음의 가치를 실천했고, 특히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지지했다”고 밝혔다.

전 세계
추모 물결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인은 뇌졸중과 그에 따른 심부전이었다. 안드레아 아르칸젤리 바티칸 보건위생국장은 교황이 뇌졸중으로 혼수 상태에 빠진 뒤 회복 불가능한 심부전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발표했다. 교황은 평생 호흡기 질환으로 고통받아왔으며, 지난 2월 폐렴 진단 이후 로마 제멜리 병원에 입원해 고용량 산소 치료와 수혈을 받았다. 38일간의 입원 끝에 3월 퇴원했지만, 건강은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절대 안정이 필요했던 상황서도 교황은 신자들과의 만남을 멈추지 않았다. 부활절을 앞두고 로마 시내 교도소를 방문하고 미국 부통령과 비공개 면담을 가졌으며, 선종 전날인 지난 20일에는 성 베드로 광장서 열린 부활절 미사에 참석했다.


이날 교황은 마지막 강복 ‘우르비 에트 오르비(로마와 전 세계에)’를 전하며 디에고 라벨리 대주교가 대독한 전체 연설문을 통해 가자 지구 전쟁 등 세계 곳곳의 참상을 언급했다. 그의 육성으로 남긴 마지막 말은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행복한 부활절을 기원한다”였다.

영국 신문 <더타임스>에 따르면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 사이에서는 이번이 교황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당시 교황의 모습을 지켜본 이들은 그가 심각한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대중 앞에 서려 했다고 전했다.

말하는 것도 힘들어했고, 얼굴엔 고통스러운 표정이 스쳤지만, 그는 군중 속 아기들의 손을 잡고 축복을 건넸다. 퇴장하며 손을 흔든 인사는 그의 마지막 작별 인사로 남게 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은 청빈과 검소함 그 자체였다. 1936년 12월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시절 양말공장서 청소와 사무보조를 하며 가족을 도왔다. 오전에는 공장서 일하고 오후에는 식품화학을 공부하며 공업학교를 다녔다.

소박한 삶과 검소한 정신은 이 시절부터 그의 삶에 깊이 자리 잡았다.

원래 화학 기술자가 되려 했지만, 17세 때 산호세 플로레스 성당 고백실서 신의 부름을 받고 성직자의 길을 결심했다. 1969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1980년 산미겔 예수회 수도원 원장을 거쳐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 2001년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아픈 몸 이끌고 마지막 연설
“행복한 부활절 기원” 인사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된 이후 그는 고급 승용차 대신 지하철을 이용했고, 시내의 작은 아파트서 생활했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도 자국 신도들에게 “로마로 오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라”고 당부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검소함은 그의 교황명 선택서도 드러난다. 2013년 3월13일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며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했는데, 이는 ‘빈자들의 친구’로 불린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서 따온 것이다. 전임 교황들이 사용하던 이름 대신, 가난한 이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즉위 이후에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청빈한 삶은 계속됐다. 화려한 바티칸 교황 전용 숙소 대신 교황청 사제들의 기숙사인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거주했고, 금 십자가 대신 낡은 철제 십자가를 착용했다. 교황의 상징인 빨간 구두 대신 평범한 검은색 구두를 신었다.


교황청서 무보수로 봉사하며 월급도 받지 않았다. 이는 예수회 성직자로서 평생 청빈한 삶을 살겠다는 ‘가난 서약’에 따른 것이었다. 201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국빈 의전 차량 대신 기아의 ‘소울’을 타고 이동하며 검소함을 보여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보적 개혁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보수적 전통이 강한 가톨릭계서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2013년에는 동성애자 사제에 대한 질문에 “그들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선한 의지를 갖추고 있다면 내가 누구라고 그들을 판단하겠는가”라고 답했다.

이 발언은 오랫동안 소외됐던 성소수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2014년 주교 시노드서 동성애와 이혼, 재혼을 포용하는 내용이 최종 보고서에 실리지 못하자, 그는 “하느님은 우리를 계속 놀라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인도하신다”고 말하며 교회의 열린 태도를 촉구했다.

동성 커플에 대한 가톨릭 사제의 축복을 허용했으며, 여성을 교황청 장관에 최초로 임명하고, 낙태 여성과 재혼자가 성체성사에 참여 가능하도록 추진하는 등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이끌었다. 이 과정서 보수층의 강한 반발에 직면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교적 위선을 지적하고 신앙의 문을 ‘모든 이들’에게 열고자 했다. 그는 과학과 종교의 융합에도 앞장섰다. 2014년 교황청 과학 아카데미 회의서 ‘빅뱅 이론’을 긍정하며, 통상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과학계와 종교계의 융화를 강조했다.

사회 정의와 인권을 강조한 교황은 정치적 사안에도 목소리를 냈다. 2017년 미국과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을 추진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악을 선으로 극복하라”며 관용의 자세를 촉구하고 국수주의와 외국인 혐오에 반대했다.

청빈의 상징
개혁 아이콘

2014년 한국 방문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월호 참사 유족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했다. 그는 유족으로부터 받은 노란 리본을 달았고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의 이 같은 태도는 전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민은 종종 그를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직면하게 했다. 그러나 교황은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모든 것을 다 같이 공유한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아닌 순수한 기독교 상태”라고 일축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자취는 약자 보호와 평화의 메시지로 가득했다. 그는 가톨릭 교회가 성 논쟁서 벗어나 현대 사회의 문제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도소 수감자의 발을 씻어주고, 이혼·재혼 신자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다가가는 등 관심의 범위를 넓혔다.

그는 세계 곳곳서 평화를 위한 행보를 이어갔다. 2015년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에 결정적 기여를 했고, 2017년에는 로힝야족 추방 사태가 발생한 미얀마를 찾아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2021년에는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이라크를 방문해 무장 테러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2022년부터 교황은 지속적으로 평화를 촉구했다. 2023년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이 발발하자 민간인 희생을 막기 위한 호소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강론서도 “가자 지구 상황이 개탄스럽다”며 전쟁 당사자들에게 휴전과 인질 석방을 촉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가난한 이들이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사 개혁에도 적극적이었다. 특정 교구장이 자동으로 추기경이 되는 관행을 깨고, 가톨릭 교세가 강하지 않은 지역서도 추기경을 임명했다. 한국의 유흥식 추기경 역시 이 같은 개혁 인사의 일환이었다.

교황은 한반도 평화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2014년 아시아 첫 방문지로 한국을 선택했으며, 이후 방북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지만 끝내 성사되지는 못했다.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앞두고 그의 두 번째 방한이 기대됐으나, 이번 선종으로 차기 교황에게 넘겨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몇 년간 건강악화로 고통받았다. 2021년 결장 협착증 수술, 2023년 탈장 수술을 받았으며, 오른쪽 무릎 악화로 휠체어와 지팡이에 의존했다. 젊은 시절 폐 일부를 절제한 탓에 겨울철이면 호흡기 질환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임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나는 건강하다. 그저 늙었을 뿐”이라며 교황직을 끝까지 수행했다.

대한민국과
특별한 인연

그의 유언은 청빈함의 상징이었다. 교황청이 공개한 유언에 따르면 그는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이 아닌 로마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지하에 특별한 장식 없이 안장되길 원했다. 비문에는 ‘프란치스코(Franciscus)’라는 이름만 새겨지길 바랐다.

유언 작성일은 2022년 6월29일로, 교황은 도면까지 첨부해 묘소 위치를 지정했다. 장례 비용도 후원금을 통해 미리 마련해뒀다.

그는 “나의 육신이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안치되기를 요청한다”고 남겼다. 교황은 평생 복된 성모 마리아께 자신을 맡겨왔다며, 이곳에 안식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는 그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진행됐다. 통상 교황의 장례는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서 거행되지만, 그는 장례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도록 전례서를 직접 개정했다. 시신을 삼중관이 아닌 목관 하나에 안치하고, 선종 확인도 개인 예배당서 진행하도록 했다.

일반 대중의 조문을 받도록 했으며, 바티칸 외부에 안장될 수 있도록 규정까지 변경했다.

교황의 공식 장례 예식은 산타 마르타의 집 예배당에 마련된 관에 유해를 안치하면서 시작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이 아닌 장소에 묻히는 드문 사례로 남게 됐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안장된 마지막 교황은 1669년 클레멘트 9세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에 전 세계는 깊은 애도를 표했다. 찰스 3세 영국 국왕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정상들이 잇따라 애도 메시지를 전했다.

한편, 미국 신문 <워싱턴포트스>(<WP>)에 따르면 그의 죽음으로 가톨릭 교회가 갈림길에 섰다고 진단했다. <WP>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죽음으로 가톨릭 교회의 한 시대가 마무리됐다”고 평가하며, 그의 대의명분이 서구 사회서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혐오와 민족주의가 다시 득세하는 시대에, 신앙의 문을 모든 이들에게 열고자 했던 영적 지도자였다. 그는 가톨릭 교회가 분열과 향후 방향성에 대한 차이를 드러낸 채 새로운 길 앞에 서게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톨릭 보수·진보 ‘내전 10년’
‘콘클라베’ 앞두고 다시 갈림길

오스트리아 수녀 브리기테 탈하머는 성베드로 광장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화와 정의, 사람들의 존엄성을 위해 발 벗고 나선 도덕적 목소리였다”며 “이제 누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WP>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이 ‘실질’보다는 ‘스타일’과 ‘어조’의 변화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동성애와 사제 결혼 등에 대한 가톨릭 교리의 근본적 변화는 이루지 않았지만, 교회의 태도와 방향성을 바꿨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제 가톨릭 교회는 차기 교황 선출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앞두고 있다. 콘클라베는 선종일로부터 15~20일 내에 열릴 예정이며, 이번 선거는 가톨릭 역사상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콘클라베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은 135명으로 최대 규모가 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교황청 주요 직책을 맡아온 추기경들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명망 높은 인물들이 차기 교황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명확한 후계자는 없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의외의 인물이 선출되거나, 표가 갈려 선거가 장기화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교황청 출입 전문기자 마르코 폴리티는 “이번 교황 선거는 다른 때보다 새 교황이 콘클라베 전이 아니라, 콘클라베 과정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가톨릭 교회는 극보수주의자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에 맞서 10년 넘게 ‘내전’을 겪은 끝에 이 선거를 맞이했다”며 “이번에는 유력 후보가 없다는 점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특히 주목받는 인물 중 하나는 한국인 최초 교황청 장관인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다. 그는 차기 교황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을 가까이서 보좌해 온 인물로 평가된다. 유 추기경은 교황의 선종 직후 “그분의 죽음서 희망과 부활을 봤다”며 “평화롭길 바라셨던 교황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추모했다.

그는 교황이 한국과 한반도 평화 문제에 깊은 애정을 가졌음을 강조하며, 교황의 발자취를 잇겠다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긴 유산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넘어선다. 그는 약자의 대변자였고, 사회 정의와 평화를 외쳤으며, 종교와 과학의 융합을 시도한 인물이었다. ‘빈자들의 친구’ ‘개혁의 아이콘’이라는 수식어처럼, 그의 발자취는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가 됐다.

그가 남긴 말들은 여전히 세계인의 가슴에 남아 있다.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 “악을 선으로 극복하라” “모든 이들, 모든 이들, 모든 이들”등 모두에게 신앙의 문을 열겠다는 그의 다짐은 가톨릭 교회를 넘어 전 인류에게 던지는 메시지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걸음은 멈췄지만, 그가 남긴 가치와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이제 그의 유산을 어떻게 계승할지 선택하는 기로에 서 있다. 보수와 진보, 전통과 개혁 사이서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다음 교황
5월 결정

그의 마지막 유언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은 화려함을 거부하고 단순함을 택했다. 바티칸 중심이 아닌, 자신이 사랑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지하에 교황명만 남긴 채 영면에 들었다. 이는 그가 평생 강조해 온 겸손과 청빈의 상징이자, 모든 이들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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