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㉖백설 위에 배를 깔다

  • 김영권 작가
2024.11.18 04:00:00 호수 1506호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늙은 무당은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상 앞에서 방울과 구리칼을 집어들고 발딱 일어나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딴 존재로 변한 듯 펄떡펄떡 뛰고 돌며 팔을 쳐들어 흔들면서 괴성을 질렀다.

한 자락 귀곡성이 흘러 뒷산으로 메아리쳤다. 한순간, 무당의 눈이 간짓대 아래 놓인 작두로 향했다. 

감나무 아래 

무당은 입술을 모아 긴 휘파람을 불고 나서 간짓대를 잡곤 시퍼런 작두날 위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 무당의 마른 발이 작두날을 딛고 올라선 순간 구경꾼들의 긴장된 비명이 고요를 찢었다.


작두날이 금방이라도 발꿈치를 썩둑 베고 솟아오를 것만 같았다. 늙은 무당은 다른 사람이 된 표정으로 작두 위에서 춤추며 야릇한 목소리로 공수를 뇌었다. 둘러선 구경꾼들은 두 손을 모으고 비볐다. 

방울소리가 절정을 이루다가 잦아들었다. 늙은 무당의 이마와 눈엔 땀과 눈물이 번지레했다. 

용운은 슬쩍 한쪽으로 갔다. 박꽃 누나는 감나무 아래 놓인 대나무 평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용운은 망설였다.

긴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백옥 같은 목과 저고리 동정 사이로 언뜻 보이는 하얀 속살에 눈이 부신 듯했다. 그는 눈을 꿈뻑거리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손에 쥔 쪽지를 만지작거렸다. 백곰을 생각하면 전해 주지 말고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은근하면서도 강력한 폭력이 떠올랐다. 그동안 백곰은 겉으로는 슬슬 웃으면서도 결정적인 폭행을 가해 자기 휘하의 원생들을 괴롭혀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쪽지를 찢어 버리는 것 역시 도둑질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용운은 망설였다. 일단은 전달을 해야 했다. 현재로서는 백곰의 속셈뿐만 아니라 누나의 진심도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본인이 읽어보고 나서 직접 결정을 하면 될 일이었다. 다만 허황된 말에 속지 말고 좋은 선택을 하길 바랄 뿐이었다. 

용운은 주춤주춤 감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누나의 흰 이마엔 땀이 송알송알 돋아나 있었다. 좀전에 늙은 무당이 춤출 때 잠깐 보였던 눈 속의 야릇한 빛은 이제 스러지고 없었다.

“너 왔니? 요즘 어떻게 지내니?”


그녀가 알아보고 용운의 손을 끌어 평상에 앉혔다. 그리고 까까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난번처럼 품에 안아주진 않았다.

용운은 쭈뼛거리다가 백곰 반장의 쪽지를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이어 주위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속삭였다.

“우리 반장님이 줬어요. 답장을 꼭 받아 오래요.”

“안됐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구나. 사실대로 그렇게 말하면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러니 걱정마. 너 배고프지?”

그녀는 일어서더니 절뚝절뚝 부엌 쪽으로 걸어가더니 종이에 싼 인절미를 한 움큼 들고 나왔다. 그 절뚝이는 걸음걸이를 보고 있자 용운은 마음이 짠해졌다. 

‘누나는 저런 몸으로도 나를 위해 주고…… 사랑해 주는데…… 난 뭐야? 멍청이처럼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서 먹어.”

용운은 떡을 두어 개 집어 감나무 뒤편으로 가서는 감꽃을 줍는 척하면서 얼른 씹어 삼켰다. 그의 눈에 물기가 어리더니 한 방울 두 방울 감꽃 위로 떨어져 내렸다.


용운은 옷소매로 눈가를 쓱 문지른 뒤 평상 앞으로 갔다. 그러고는 말없이 종이 위의 떡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다음 절을 꾸벅하곤 누나가 대꾸할 사이도 없이 곧장 집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의 눈엔 다시 눈물이 맺혔다. 꽹과리와 장구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귀곡성 중간에 밀회
내게 준 편지 공상

용운은 들길을 걸으면서 종이에 싼 인절미를 꺼내 음미하듯 씹어 먹었다. 박꽃 누나의 하얀 미소가 떠올랐다. 다 먹은 용운은 종이를 구겨 버리려다가 떡고물까지 핥아 먹었다.

그 낡은 잡지 쪼가리엔 희미하게 바랜 글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용운은 박꽃 누나가 자기에게 써서 준 편지라면 좋겠다고 공상을 하며 한 자씩 읽어 보았다.

거센 폭풍과 폭설 속을 그는 사흘 밤낮 동안 걸었다. 영하 40도의 한파 속에서 산비탈을 걸어 오를 때 그의 손과 무릎과 발은 피투성이로 변했다.

피와 기력과 의식을 조금씩 잃어 가며 그는 벌레 같은 끈기로 전진했다. 넘어지면 마지막 남은 기운을 모아 헐떡거리며 일어섰다.

차가운 백설(白雪)의 침대에 엎어져 버리면 다시는 고향을 보지 못할 테니까. 추위는 시시각각 그의 몸뚱이를 얼어붙게 했다. 거의 죽어 버린 근육을 그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계속 움직였다.

눈 속에서 헤매다 보면 생존 본능이 서서히 사라진다. 그냥 엎어져 차갑지만 깊은 잠 속에 빠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하지만 그는 고향의 초원과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런 유혹을 견뎌냈다. 얼어 부풀어 오른 발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매일 조금씩 휴대용 칼 끝으로 구두를 잘라냈다.

그러다가 한번은 눈비탈에 미끄러져 백설 위에 배를 깔고 엎어진 채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희망과 의지력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아! 저 산을 넘어야 하는데…… 이젠 더 어쩔 도리가 없어.’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고난을 잊고 편안해지려면 그냥 눈을 감기만 하면 되었다.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는 순간 험준한 바위산도, 얼음도, 살을 짓뭉개는 듯한 동상도, 빈 몸으로 끌고 가야 할 육중한 삶의 무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리.

그는 이 거친 세상과는 다른 안락한 천국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려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눈앞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헤쳐 나갈 수 없을 듯한 설산(雪山)의 무정함…… 문득 그의 귓가에 아주 미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실낱같은 소망으로 그 소리의 정체를 찾아 보았다. 

그것은 그의 손목시계에서 나는 소리였다.

문자판의 붉은 초침이 바야흐로 9자 부근을 지나 시간의 비탈을 숨가쁘게 올라가고 있었다. 초침의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건 외침처럼 들렸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한 발짝 딛기

그는 시체가 일어난다는 기묘한 무의식 속에서 조금씩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초침처럼 한 발짝씩 옮겨놓았다. 

‘내가 나라는 의식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냥 걸을 뿐이다. 한 발짝씩 내딛는 것…….’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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