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났다. 중요한 군사정보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면서 국가안보에 구멍이 생겼다. 정부 부처를 비롯해 정보기관까지 싹 다 뒤집혔다. 누구의 소행인가? 목적은 무엇인가?
군사기밀이 유출됐다. 음지서 일하던 이들의 정보가 누구인지 모를 사람 손에 넘어갔다. 당장 이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됐다. 유출된 정보의 범위와 규모, 유출 시점, 유출한 인물 등이 의문으로 떠올랐다.
누구에게…
어떻게 왜?
지난달 30일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 소속 군무원 A씨가 구속됐다. A씨는 군사기밀누설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국방부 중앙군사법원은 지난달 29일 군검찰이 청구한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정보사 해외 공작 담당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A씨는 대북 정보수집을 맡는 정보사 요원들의 개인정보 등 수천건의 정보를 유출한 혐의를 받는다. 국군방첩사령부(이하 방첩사)는 지난달 A씨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입건하고 압수수색 등을 통한 강제수사를 진행해 왔다.
군 당국에 따르면 A씨는 개인 노트북에 저장돼있던 대북요원 현황을 중국인에게 파일 형태로 전송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해당 파일에는 각국 대사관의 외교관 등 합법적 신분으로 상대국 정보를 수집하는 ‘화이트요원’과 사업가 등으로 위장해 활동하는 ‘블랙요원’의 신상정보가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개인 노트북 해킹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군사기밀을 개인 노트북으로 옮긴 행위 자체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인 점으로 봤을 때 고의성 여부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공범이나 조력자 여부, 정보거래 가능성 등도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유출된 2, 3급에 해당하는 기밀이 중국인을 통해 북한으로 향한 정황도 포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국인은 북한 정찰총국 첩보원일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우리나라 대북 첩보망에 구멍이 뚫렸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실제 일부 블랙요원은 신분 노출 우려에 따라 현지 활동을 급히 마무리하고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분이 노출된 요원은 재파견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보망 손실을 피할 수 없다는 게 중론이다.
블랙요원 신상정보 등 수천 건
중국인 통해 북한으로 간 정황
정보사는 “사건 인지 시점은 6월께로 유관 정보기관으로부터 통보받아 알았다”고 밝혔다. 지난달 30일 국회 비공개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서 나온 발언이다. 정보위 국민의힘 간사인 이성권 의원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간사인 박선원 의원이 한 브리핑에 따르면, 정보사는 이번 기밀 유출이 해킹에 의한 게 아니라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사 군무원의 군사기밀 유출 의혹은 정쟁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적국을 외국으로 바꾸는 간첩법 개정을 누가, 왜 막았느냐”고 비판했다. 이는 민주당을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됐다.
한 대표는 지난달 30일 자신의 SNS에 “중국 국적 동포 등이 대한민국 정보요원 기밀 파일을 유출했다”며 “황당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간첩죄로 처벌 못한다. 우리나라 간첩법은 적국인 북한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현행법은 국가기밀 정보를 ‘적국’에 넘길 때에만 간첩죄를 적용한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그러면서 “저걸(기밀유출 사건) 간첩죄로, 중죄로 처벌해야 맞나, 안 해야 맞나”라며 “이런 일이 중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다른 나라서 벌어졌다면 당연히 간첩죄나 그 이상의 죄로 중형에 처한다”고 지적했다. 21대 국회서 적국을 외국으로 바꾸는 간첩법 개정안이 4건 발의됐지만 무산된 점도 언급했다.
한 대표는 “당시 4건 중 3건을 민주당이 냈다. 그런데 정작 법안 심의 과정서 민주당이 제동을 걸어 무산됐다”고 비판했다. 이어 22대 국회 개원 이후 국민의힘 주호영 의원이 대표발의한 형법 개정안도 소개했다. 해당 개정안은 해외 국가‧개인‧단체의 간첩행위에 대해 5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휴민트 박살
가능성 제기
그는 “격변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외국과 적국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구분일 뿐”이라며 “이번에 꼭 간첩법을 개정해서 우리 국민과 국익을 지키는 최소한의 법적 안전망을 만들자”고 촉구했다.
한 대표의 발언에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은 반발했다. 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이 법안(간첩법 개정안)이 추진되지 않은 것을 ‘민주당 탓’으로 돌리고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회의록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고 적었다.
박 의원이 언급한 회의록은 21대 국회였던 지난해 9월1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 회의 내용이다.
박 의원은 “한 분께서는 새로 외국을 위한 간첩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뒀을 때 특별법 규정은 어떻게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하셨고 다른 분도 국가기밀의 범위에 대한 우려를 말씀하신 바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당시 소위서 ‘적국’을 ‘외국’으로 넓힐 경우 일명 ‘산업스파이’ 같은 사례도 간첩죄로 처벌한 것인가 등의 논의가 이어졌고 결론 내지 못하고 계속 심의하게 된 것”이라며 “이것을 ‘민주당이 제동을 걸어 무산됐다’고 하기엔 자당 의원님들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냐. 이런 식의 가짜뉴스는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민주당 강유정 원내대변인도 브리핑을 통해 “당시 개정안을 완강하게 반대한 건 법원행정처였다. 개정안을 심사한 속기록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라며 “국민의힘 소속 소위 위원들도 입법적인 검토가 필요하니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간첩법 논란
입장 엇갈려
이어 “형법 개정안을 발의한 우리당 의원들은 개정안 심사와 통과를 위해 수년 동안 거듭 노력해 왔다. 19대, 20대, 21대 국회 매 임기마다 발의해 왔다”며 “미비한 법률 개정을 위해 법무부에 도움을 구했을 때 한동훈 (당시)법무부 장관은 그때 매듭을 지었어야 한다. 장관일 때 놓치더니 왜 애먼 책임을 이제 와서 민주당에게 떠넘기냐”고 되물었다.
민주당의 반발에 한 대표는 “적국을 외국으로 바꾸는 간첩법은 지난 21대 국회 법사위 제1소위서 3차례나 논의됐지만 처리되지 못했다”며 “민주당 의원들은 취지에 공감한다면서도 신중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하며 법안 처리를 막았다”고 거듭 주장했다.
민주당 김민석 의원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 시절 법원행정처가 강력하게 반대해서 여야 의원들이 공히 법 보완을 주문했던 정황이 국회 속기록에 다 나와 있다”며 “책임이 있다면 본인이 더 크고 그리 통과시키고 싶었다면 본인이 장관 시절 노력했어야 할 일”이라고 공격했다.
한 대표는 지난 1일에도 “이 사건을 단순한 기밀보호법으로 처벌하기에는 대단한 중죄”라며 “이 정도로 간첩이 되지 않는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주는 것으로는 우리 안보를 지킬 수 없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이날 열린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서 “문재인정부는 국군 기무사령부를 안보지원사로 바꾸면서 요원의 30%를 감축했다”며 “민주당은 2020년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기능을 폐지하는 법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켜 국정원의 방첩 역량을 무너뜨렸다”고 문정부를 겨냥했다.
한 대표의 주장에 민주당이 반발하고 또다시 한 대표가 재반박하면 민주당이 입장을 내는 양상이 계속되면서 정작 사건의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20~30년 동안 구축한 휴민트(인적 네트워크)가 붕괴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 책임 공방만 벌이는 정치권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해킹 주장하고 있지만…
정치권은 책임 공방 중
특히 앞서 ‘수미 테리 사건’으로 이미 한 차례 정보 구멍이 드러난 시점에 또다시 군무원의 군사기밀 유출 의혹이 일어난 점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실제 지난달 30일 정보위서 간사인 국민의힘 이성권 의원은 “수미 테리 사건에 이어 해외 정보수집 부문서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정보 역량을 복구해야 한다.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정보위가 경고 조치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지난달 16일 미 연방 검찰은 중앙정보국(CIA) 출신 대북 전문가인 수미 테리를 기소했다. <뉴욕타임스>는 뉴욕 연방 검찰의 소장을 인용해 한국계인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고가의 저녁 식사와 명품 핸드백 등을 대가로 한국 정부를 위해 활동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수미 테리는 2013년부터 10여년간 주미 한국대사관 소속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파견관과 만나 비공개 정보 등을 제공했다. 뉴욕 연방 검찰은 그 대가로 수미 테리가 루이비통 핸드백, 3000달러 상당의 돌체앤가바나 코트, 3만7000달러 상당의 금전 등을 수수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수미 테리가 한국 정부의 입장을 사실상 대변하는 언론 기고나 발표, 접근이 쉽지 않은 인사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한국 정부를 위해 활동한 행위를 지적했다.
미 정부 관료와의 비공개 모임 등에서 획득한 정보를 한국 정부에 넘긴 부분도 기재했다. 또 뉴욕 연방 검찰은 수미 테리가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에 등록하지 않은 채 사실상 한국의 요원으로 활동했다고 규정했다.
미국은 외국대리인등록법에 따라 외국 정부나 정당, 회사 등의 정책 및 이익을 대변하거나 홍보하는 사람은 법무부에 신고해 활동을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수미 테리는 2016~2022년 사이 최소 세 차례 의회 증언을 위해 선서하는 자리서 자신은 신고 대상이 아니라고 답했다.
정보 구멍
국정원도?
이 문제에 대해 국정원은 “한미 동맹의 훼손은 일절 없다”고 강조했다. 정보 협력에도 큰 문제가 없고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국정원은 국회 정보위 현안 보고서 “안보 협력에 문제가 있다면 협력이 축소·파기될 수 있는데 전혀 그런 점이 없다”며 “이 건을 양국 안보 협력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문제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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