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삼의 맛있는 정치> 총선공약서, 의무 발행 위한 공선법 개정해야

2024.03.28 14:34:13 호수 0호

한국은 지금 고금리, 고물가, 고환율 등에 따른 경기침체를 겪고 있다. 우크라이나·중동 전쟁으로 인한 유가 고공행진과 북핵 위기까지 겹치면서 국·내외적으로 복합적 위기를 맞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 비전을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정치가 아닌 존중과 타협의 자세가 선행돼야 한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사사건건 대치하며 불신과 혐오만 키우고 있다.

상대를 악마화하는 증오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사이, 정치가 실종되고 대의민주주의는 공멸의 위기에 빠지고 있다. 정치의 본령은 공존·공생을 위한 대화와 타협이다. 다원화된 사회서 서로 다른 가치와 이익이 존재하고 갈등한다.

정치가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의 다양한 갈등과 문제들을 직시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공존과 통합을 위한 합리적 토론과 사회화 과정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제도 내 정치권은 국민을 위한다며 ‘달콤한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으며,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도록 욕망만 부추긴다.

결국 국민을 혹세무민하는 것이다. 불편하고 회피하고 싶겠지만, 현실을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고통을 어떻게 완화하고 분담할지 토론해야 한다.

국익보다 지역개발 로비스트 자처하는 정치권


내달 10일 치러질 총선에서는 스물두 번째 국회의원을 뽑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를 제대로 치러본 적이 없다. 대통령의 거수기 노릇만 하겠다고 자처하거나 정파의 이해를 우선하겠노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탓이다.

국익보다 지역 현안들을 먼저 챙기겠노라고 떠벌렸다. 반면, 법률을 제정하고 예산을 심의하며,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국회 구성원으로서의 입법과 정책공약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기능도 다르고 내용도 부실한 제품(후보자)을 국민에게 강매해 왔다. 실제로 21대 국회의원들의 공약 중 입법 관련 공약은 전체 공약의 14.02%에 불과했다. 국민의 대표로서 제시한 국정 공약도 19.91%에 그쳤던 반면, 지역 공약은 73.98%에 달했다.

국민은 입법부인 국회 구성원을 선출하고자 했지만, 정치권은 지역개발 로비스트를 자처하고 있었다. 선거 과정서 국민에게 대의를 위임받는 입법권, 국정감사권, 예결산 심의권을 중심으로 선거공약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국회가 국민의 대표기관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는 지체(遲滯)의 주요 원인이 무엇인지를 확인시켜주는 지점이다.

국회의원들의 선거공약은 지켜지지도, 지킬 의지도 부족했다. 지난 20대 지역구 국회의원 253명 중 58명은 학교 유치 공약 150건을 제시했으나 20%가 채 안되는 29건만 지켜졌다. 특히 특목고, 국제학교 유치 공약은 12명이 약속했는데 단 1건도 지켜지지 않았다.

대학을 유치하겠다는 공약도 25건 발의됐지만, 일부라도 지켜진 것은 단 3건에 불과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유치하겠다는 공약도 3건 중 2건은 진척이 없었다. 철도와 지하철 같은 사회간접자본(SOC) 공약도 289건을 약속했는데, 지켜진 건 27%에 불과했다.

수도권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들의 지하철과 철도 노선 관련 공약은 무려 102개나 발의됐고, 재정 추계가 가능한 50여개의 노선만 해도 서울·경기·인천 예산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83조원이 넘었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공약은 총 7600여개였지만 임기 4년간 지켜진 것은 46.8%에 불과했다.

이번 21대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공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총선 지역구 출마 후보 405명이 제시한 공약을 분석한 결과(2022년 6월30일 기준), 그해 나라 살림 512조원의 8배가 넘는 4399조원이 필요했다. 이는 수서고속철(SRT)을 1400개나 만들 수 있는 액수였다.

지역구 국회의원 공약의 내용 구성을 살펴보면 전체 중 국정 공약의 비율은 19.91%에 불과했고 66.32%는 입법과는 관련이 없는 재정 관련 공약들이었다.


공약 이행 분석 결과 참담

지역구 국회의원 2년 차 공약 이행 분석 결과는 참담했다. 입법이 필요한 공약인데도 입법 활동 명세가 전혀 없는 경우가 27.09%였고, 입법 활동 내용이 공약의 취지와 부합하는지도 모호했다. 교통 관련 공약 950여개의 완료율은 16%(160개)에 그쳤다. 70% 가까이는 재정을 단 한 푼도 확보하지 못했다.

병원 유치 공약 이행률은 12% 수준이었다. 재정이 필요한 공약임에도 재정 확보 내용이 전혀 없는 경우는 52.02%, 재정 추계조차 못하는 경우도 47.39%에 달했다. 관리체계 부실도 문제였다. 공약 실천 계획 수립과 이행 관리, 평가 등의 관리체계가 전혀 없었다.

또 보좌진이 자주 교체되다 보니 의원실엔 공약을 꾸준히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외국의 경우, 정당은 정책위 산하 매니페스토 위원회를 설치해 의원들의 공약 이행을 체계적으로 돕고 있다.

의원 스스로는 국회 내 회파(會派)를 구성해 공약 이행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는 공약 이행을 위한 소속 정당과의 협력이나 소속 의원들과의 유기적 협업 등 체계적 공약 관리 시스템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공약의 폐기, 변경 등은 의원실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임의 조정됐다.

공약 이행을 위한 입법 등 의정활동 내용에서는 선거서 공약으로 제시한 내용과의 부합 여부가 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공약 이행 정보를 홈페이지에 주기적으로 공개하지도 않았다. 선거공약의 주인은 유권자라는 인식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오랜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는 국가들의 국회의원 선거는 ▲후보로서 어떤 철학과 가치를 가졌는지 ▲입법 계획은 무엇인지 ▲이를 이행하기 위한 핵심 공약과 우선순위는 어떻게 되는지 ▲어떤 위원회 활동을 희망하는지를 제시하고 치열한 경쟁을 하며 선거를 치른다.

앞서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는 21대 총선서 후보자들에게 의정활동 계획을 물었고 후보자 1101명 가운데 448명(40.6%)이 답변을 제출했다. 선거 이후 취합해 본 결과, 당선자의 79.8%가 ‘의정 활동계획서’를 제출했고, 낙선자는 29%만 제출했다.


당선자와 낙선자의 차이가 확연했다. 20대 총선서 의정 활동계획서를 공개한 의원과 미공개한 의원을 비교해 보면, 선거 과정서 의정 활동계획서를 작성해 공개한 의원의 공약 완료율이 10.46% 더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국회(입법)의원으로서의 국정 현안과 상임위 활동, 입법 계획 등이 담겨있는 의정활동 계획서의 공개적 요구가 일하는 국회로 거듭나는 첫 걸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줬던 결과였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는 이번 4·10 총선에 적용할 선거제도 개편안에 대해 논의했다. 하지만 선거법 개편은 정파의 유불리보다는, 의회민주주의가 국민에게 철저하게 외면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냉철한 분석부터 출발해야 한다.

의정활동 계획 중심, 선거공약서 마련돼야

또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 비전을 고민할 수 있는 국회,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한 존중과 타협을 선행하는 정치 등의 의회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것이 시급한지를 우선 고민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회의원들도 의정활동 계획을 중심으로 하는 선거공약서를 발행할 수 있도록 공직선거법 66조를 개정해 유권자들의 판단 근거를 넓혀야 한다.

공직선거법 66조는 매니페스토 선거를 활성화하고, 무분별한 공약 남발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대통령선거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의 경우, 공약을 담은 인쇄물(선거공약서)에 ‘사업 목표와 우선순위, 이행 절차, 기한, 재원 조달 방안 등을 게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은 예산편성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국회의원 선거에는 해당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매 총선마다 더욱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기회가 가로막혔고, 다른 가치와 이익의 토론과 사회화 과정을 박탈했다는 비판이 지속해서 제기돼 왔다.

한국의 대의민주주의는 공멸의 위기에 빠졌다. 대의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길은 현실을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고통을 어떻게 완화하고, 분담할지 상시 토론하는 의회민주주의 회복이다. 그 열쇠는 무분별한 공약 남발을 막고, 국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입법과 정책공약을 중심으로 의정활동을 펼치는 일이다.

선거공약은 대의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논거며, 그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은 공직선거법 66조 개정을 통해 입법과 정책공약을 중심으로 치러지길 기대한다.

김명삼 대기자
<hntn11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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