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자연적인 현상은 자연적인 현상의 여집합이다.
우주를 하나의 전체집합으로 볼 때, 지구에 사는 사람이 보고 느끼고 깨닫고 과학으로 증명한 사실이 부분집합이면 사람의 생각이나 과학의 한계를 초월한 모든 것은 여집합이라 할 수 있다.
여집합이 전체집합의 밖에 있지 않고, 부분집합과 함께 전체집합 안에 있듯이, 사람의 한계를 넘어 존재하는 것도 사람이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연적인 현상과 초자연적인 현상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원래 하나의 전체 속에 포함된 동질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전체집합의 부분집합인 자연적인 현상만을 전체로 알고 초자연적인 현상은 전체 밖에 있는 다른 세상으로 보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우주 안의 초자연적인 현상은 자연적인 현상의 여집합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우주 안의 지구라는 부분집합보다 훨씬 큰 여집합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자연적인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초자연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독일 조직신학의 대가인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는 그의 저서를 통해 “초자연은 숨겨진 자연이며, 자연은 드러난 초자연“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70여년 전, 폴 틸리히도 자연과 초자연을 전체 안에 있는 동질의 개념으로 봤던 것이다. 폴 틸리히의 주장이 동질의 것을 놓고 드러났느냐 숨겨졌느냐에 따라 자연과 초자연으로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조물주 입장에서는 자연이나 초자연이나 동질의 개념인데, 한계의 벽을 넘지 못하는 사람이 이분법으로 나눠 놓고, 초자연을 신의 영역에 두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초자연이라는 여집합이 계속 드러나면서 자연이라는 부분집합의 영역이 점점 커져 초자연이라는 여집합이 없어지고, 결국 사람이 신과 같이 되면서 종말이 올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시각적인 모든 것도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으로 나뉘는데, 여기서 가시적인 것이 부분집합이면 비가시적인 것은 여집합이 된다.
우리는 가시적인 것을 전체인양 착각하고 있으며, 비가시적인 것은 인정하더라도 가시적인 것에 비해 아주 작다고 생각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초자연이나 비가시적인 것을 자연과 가시적인 것의 반대 개념이 아닌 여집합의 개념으로 봐야 하고, 초자연이나 비가시적인 것의 영역이 자연이나 가시적인 것의 영역보다 훨씬 더 크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드러난 것을 통해 숨겨진 것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깨달을 줄 알고, 숨겨진 것을 통해 드러난 것의 의미를 더 확실하게 볼 줄 알아야 한다.
유무(有無) 문제도 큰 의미에서는 유와 무를 동질의 개념으로 보고, 무를 유의 여집합으로 봐야 한다.
* 이 기고는 <일요시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