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넘은 막말’ 천정배 민주당 최고위원

2011.01.04 11:19:51 호수 0호

‘보장된 삶’ 버리고 택한‘투쟁하는 삶’?


“이명박정부를 소탕해야 하지 않겠나.” “국민을 실망시키는 정권을 확 죽여 버려야 하지 않겠나.” 다름아닌 민주당 천정배 의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제1야당의 최고위원이 입에 올린 말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이처럼 도를 넘은 ‘막말’에 여당은 가시 돋친 말들을 쏟아내며 천 의원과의 공방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에 따라 세인들의 시선은 온통 사건의 주역인 천 의원에 쏠렸다.

군사독재정권의 판·검사 임명장 거부…변호사 선택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정치권 러브콜 쇄도

전남 신안의 자은도란 작은 섬에서 태어난 민주당 천정배 의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참고서 하나 구하기 어렵던 외지, 전라도 목포에서 혼자 힘으로 열심히 공부한 끝에 서울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한 데 이어 졸업과 동시에 사법시험도 합격 했다. 대학시절에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뭔가를 바꾸어 보겠다는 생각을 품기도 했지만 남들 앞에 나서기엔 숫기가 부족했고 수줍음도 많은 청년이었다.

5·18 광주항쟁
인권에 관심



그런 천 의원을 바꿔놓은 사건이 바로 5·18 광주항쟁이었다. 당시 군복무 중이던 천정배가 받은 충격과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또 다시 무고한 시민을 향해 자행된 그 같은 악행이 벌어진다면 그 땐 스스로 시민군이 되어 총을 들겠다는 마음을 먹을 정도였다.

이 마음속 분노는 평범하게 살아가던 천 의원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놨다. 반독재 민주화와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것.
천 의원은 판·검사라는 보장된 미래가 아닌 변호사를 선택했다. 군사쿠데타와 양민학살을 통해 부당하게 권좌에 오른 군사독재정권의 임명장을 받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천 의원은 이른바 ‘잘 나가는’ 국제비즈니스 변호사였다. 국내 최대 로펌에서 4년 간 외환·무역·조세 등의 분야를 두루 거치며 국제변호사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 아래 감옥으로 끌려가는 학생, 노동자, 재야운동가들을 보며 그의 마음은 바뀌게 된다.

결국, 힘들게 쌓아온 국제변호사로서의 보장된 미래를 과감히 떨쳐버린 그는 1985년 10월,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고 본격적인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천 의원은 1988년 5월28일 창립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창립멤버로 상임간사, 국제인권위원장 등의 요직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폈다. 그러다보니 언제부턴가 천 의원의 이름 앞엔 인권변호사 꼬리표가 따라 붙었다.

정치권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천 의원의 진가를 일찍이 알아봤다. 천 의원에게는 러브콜이 쏟아졌다. 실제로 1988년에는 출마와 동시에 당선이 보장되는 고향 신안의 지역구까지 제안 받는 등 천 의원을 향한 정치권의 구애는 뜨거웠다. 하지만 천 의원은 이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자신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보다 6월항쟁 이후 미진한 한국사회의 인권을 증진하기 위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천 의원이 정치권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3년, 김근태 의장이 이끌던 재야단체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에 법조계 일원으로 참가하면서다.

본격적인 변화의 징후가 나타난 건 지난 1995년이었다. 당시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민회의 창당을 추진하던 시기, 그의 측근으로부터 정식 정치권 영입 제안을 받게 된 것. 그리고 그의 고민이 시작됐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천 의원은 ‘반세기가 넘도록 우리 사회에 갖가지 병폐를 심어놓은 보수세력의 집권을 막는 데 힘을 보태겠다’는 일념 하에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6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천 의원은 19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국민회의 정책위원회 부의장이란 중책을 맡아 대선공약 개발에 온 힘을 쏟아 부었다. 그야말로 입과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다. 그 결과,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며 건국 이래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천 의원은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발굴,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천 의원은 2001년 7월 현역의원 최초로 노무현 후보의 지지선언을 했다. 언론은 시기상조론과 더불어 찻잔 속의 태풍으로 폄하했다. 당시 민주당 주류인 이인제 대세론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상황이었던 게 그 이유였다. 때문에 노무현이 이인제를 누르고 후보가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인제 대세론의 기저에는 대선에 패배하더라도 호남과 충청표를 묶으면 국회의원은 할 수 있으리라는 정치공학적 계산이 깔려있었다. 또한 대세를 벗어난 행동으로 정치적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두려움도 상당부분 차지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천 의원의 결단에 지인들의 만류가 이어졌다. 천 의원의 지역구인 경기도 안산시는 호남과 충청 출신 유권자를 합하면 60%를 넘었고, 천 의원의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대선공약 개발

하지만 천 의원은 단 한 장의 필승카드가 노무현이라고 단언했다. 노무현 후보가 한국 사회의 개혁을 이끌 적임자라는 명분론과, 호남과 영남의 일부 그리고 젊은 개혁층의 표를 확실하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현실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천 의원의 예측은 적중했다. 광주 경선의 승리를 발판으로 이인제 대세론을 뒤집으며 노무현이 민주당의 공식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것. 그러나, 노무현 앞에는 월드컵 바람을 타고 정몽준이란 새로운 태풍이 등장했다. 철옹성 같은 기득권세력을 대변하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가 실패한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노무현 후보 선대위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일부는 눈물까지 흘리며 후보 단일화를 반대하고 나섰다. 시선은 또 다시 천 의원에게로 쏠렸다.

모든 의원들은 천 의원이 후보 단일화를 반대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후보 단일화를 찬성했고 적극 나서서 추진했다. 그 때 계속 상승했던 정몽준 후보의 지지율이 하향국면에 접어들고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다시 오르는 추세라서 노 후보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결국 천 의원의 선택은 주효했고 집권에 성공했다. 그의 승부사적 기질이 민주개혁세력이 재집권하는 데 큰 몫을 한 것이다.

그런 천 의원에게 2003년 11월11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 중 하나다. 모진 산고 끝에 열린우리당이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정치개혁과 정당개혁을 위해 최초로 지구당위원장을 내던졌던 천 의원은 신당 창당 선언과 당의장 직선제 도입, 국민참여정치 실천 등 새로운 정치를 위한 수많은 어려움과 맞닥뜨려야 했다. 2002년 12월, 대선 직후부터 시작된 정치개혁 논의가 가시적 성과를 맺기까지 그야말로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천 의원은 민주당 안팎의 모든 개혁세력을 끌어안는 정치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은 기존 정당의 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른바, 두터운 기득권의 벽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천 의원은 기존의 낡은 정치행태로는 새 정치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비로소 신당창당의 불가피함을 깨닫게 된다.

그는 신당의 밑그림으로 제도개혁과 인물의 교체를 상정했다. 당헌, 당규에 국민참여를 통한 상향식 의사 결정, 대선 후보와 당의장의 직접 선거 등의 콘텐츠들을 채워 나갔다. 또한 원내대표제를 도입하고 의원총회를 최종 의사결정기구로 만드는 등 원내 정책정당화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열린우리당은 우리 정치의 오랜 폐단이었던 돈정치, 보스정치, 지역주의 정치의 타파를 위해 탄생한 최초의 정당이었고, 천 의원 개인으로선 정치생명을 건 또 한 번의 모험이었다.

그리고 지난 2004년 4·15 총선, 열린우리당이 국회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며 역사상 최초로 개혁세력이 의회권력을 장악했다. 민생입법과 개혁입법을 처리할 최적의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천 의원 역시 선거에 출마해 지역구를 누비며 국민이 바라는 정치개혁을 약속했고, 결국 승리를 거머쥐게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 발굴, 참여정부 탄생시킨 장본인
모진 산고 끝에 열린우리당 창당 우여곡절 많아

이후 3선을 한 천 의원은 국민과의 약속을 반드시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에 도전했다. 경쟁자는 5선의 전략가이자 현재 대선주자로 뛰고 있는 이해찬 의원이었다. 막강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치밀한 전략까지 마련한 이 의원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당내 중진들은 물론 재야파까지도 상대편에 줄을 섰다. 천 의원을 지지할 것이라 예상됐던 몇몇 측근까지 등을 돌렸다. 여기에 ‘청와대가 관리형 원내대표로 이 의원을 민다’는 소문까지 퍼지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당 쇄신운동, 노무현 최초 지지, 열린우리당 창당 등 정치적 고비마다 한발 앞서 결단을 내리고 실천해 온 천 의원의 진정성은 마침내 초선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결국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첫 집권여당의 원내사령탑에 올랐다.

원내대표에 오른 천 의원의 첫 마디는 “정기국회 100일 동안 국회 반경 1km를 벗어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초기엔 아예 국회 안에서 주거를 해결했지만, 그로 인해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직원들의 애교 섞인 원성(?)에 밀려 국회 근처 오피스텔로 거처를 옮겼다. 매일 아침 7시면 원내대표단 회의를 열었고, 수십 차례의 의원총회를 소집했다.

그 결과, 물리력을 동원한 한나라당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4대 개혁입법 중, 과거사법과 언론개혁법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일궈냈다. 또한 기금관리기본법, 민간투자법,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 등 경제활성화를 위한 3대입법을 포함해 100여개의 민생법안을 처리했다.

막말 파문 난관
돌파할 해법 주목

이후 법무부장관 등을 지낸 천 의원은 국회 미디어법 강행 처리에 반발해 의원직을 사퇴했다가 올해 초 국회에 다시 복귀했다. 이 가운데 최근 막말 파문이 불거져나오면서 세인들의 싸늘한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다. 과연 천 의원은 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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