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51)십자가에 매달린 두 어린 양

  • 김영권 작가
2025.05.12 06:00:00 호수 1531호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새해 들어 첫 탈주범들을 시범적으로 엄중히 처벌하여 다른 원생들을 단속하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이고 있었다. 설교를 마친 사감은 얼마 후 바닷가에 두 사람만 남겨둔 채 원생들을 인솔하여 떠나가 버렸다.

탈주범 말로

석양 비낀 하늘에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고, 하늘은 점차 보랏빛을 거쳐 청회색으로 변해 갔다. 이어 완전히 컴컴해졌다.

용운과 피에로, 십자가에 매달린 두 어린 양은 밤바다를 바라보며 몸을 떨고 있었다. 턱도 조금씩 떨려서 다그락 다그락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소금기를 머금은 찬 해풍이 불어오고 기온은 뚝 떨어졌다.

“형, 어쩌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까?”


“이 기둥에 한번 매이면 내일 해가 뜰 때까지는 절대로 풀어 주지 않는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

용운처럼 피에로도 역시 이빨을 떨면서 대답했다.

“내일 아침까지 이런 식으로 서서 견딜 수가 있을까?”

“모르지. 내일 해가 떠올라 봐야 알겠지. 우리 생사가 걸린 내기를 한번 해볼까? 스릴 있겠는걸.”

“형, 농담하지 마, 제발…… 이건 영화 장면이 아니라 실제 현실이란 말야.”

그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짧은 비명과 신음소리를 냈다. 좀전까지는 바위 아래쪽의 모래톱을 핥으며 해조음을 들려주던 바닷물이 어느결에 서서히 차올라 바윗돌을 넘고 그들의 발목까지 적셔 왔던 것이다.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닌걸. 아, 무서워 죽겠군.”

좀전까지 영화 운운하던 피에로가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번 겁을 먹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터였다. 용운은 피에로의 정신을 깨게 하고 자신도 공황상태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마구 지껄여댔다.

“형, 거지가 떠도는 세상 자체가 곧 바다였어.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가게 돼…… 누구도 가까이 가기 싫어할 정도로 을씨년스런 개천가 다리 밑 움막이었지만, 거지들에겐 비바람을 막아 주고 사람의 냄새와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 소중스런 공간이었어. 비록 구걸하러 다닐 적에는 비굴하게 남의 눈치를 살피게 되지만 일단 시장 안에 모여들면 각자가 겪은 얘기로 꽃을 피워 시간 가는 줄 몰랐지…… 한겨울, 남대문 지하도에 신문지를 깔고 노숙을 하는데 통금시간이 넘으면 셔터를 내리고 밖으로 내쫓았어. 거리에서 추위 속에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온갖 노숙자들이 해진 가마니를 덮고 새우처럼 웅크린 채 잠을 잤지.”

“남들은 코를 막고 질겁하는 고약한 냄새를 맡으면서도 거지들은 부모 형제의 품과 같은 포근함을 느꼈어…… 새벽에 눈을 뜨면 온몸이 얼어붙어 있지. 계단 위로 올라가 보면 불꽃이 피어 오르고, 일찍 나온 시장 상인들이 휴지며 판자대기를 모아놓고 불을 피워. 노숙자들은 그 불을 쬐면서도 희망 없는 눈빛에 돌덩이처럼 앉아 있다가 불이 사그라들면 하나 둘 일어나 빌어먹기 위해 어디론지 떠나는 거야……”


공황 빠지지 않기 위해
컴컴한 밤바다에 포효

“약아빠진 놈들은 구걸하는 수법이 있어. 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여자들에게 다가가 흙탕물을 묻힌 손을 벌리며 말하지. ‘한푼만 도와주세요.’ 만일 피해 가는 경우엔 당장 옷을 붙잡아 더럽힐 듯이 굴며 달려들거든. 그러면 울며 겨자 먹듯 돈을 던져 주었어…….”

용운은 말이 끊어지는 게 두렵다는 듯 계속 지껄였다.

“어느 날 외팔이라는 아이가 어느 곳으로 데려갔어. 그 움막엔 팔이 없거나 다리가 무릎 부분에서 잘려 버린 아이들이 모여 있었어. 노인도 몇 명 보였어…… 원래부터 불구자였던 경우도 있지만 일부러 가장하는 경우도 있다더군. 더 무서운 건 실제로 그렇게 보여 실감을 살리기 위해 팔이나 다리를 도끼로 잘라낸다는 거야…… 그래서 목발을 짚거나 외팔이의 갈쿠리를 슥 내밀며 볼펜이나 껌 따위를 파는 사람, 지하도나 육교에서 상처를 내보이며 구걸하는 사람, 외상값 받아 주고 빚돈 찾아 먹는 사람, 시장 주변을 돌면서 장사꾼들에게 얻어먹는 사람 등…… 어쨌든 살기 위해 일을 하러 나가. 난 무서워서 곧 도망쳐 버렸지.”

“아, 너무 추워.”

피에로가 중얼거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닷물은 점점 더 차올라 그들의 무릎을 적시고 허리를 휘감더니 가슴께에서 출렁거렸다.

컴컴한 밤바다는 거대한 괴물처럼 달려들며 포효했고, 그럴 때마다 허연 파도는 괴물의 침처럼 둘의 얼굴에 튀었다. 그 괴물은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라 현실의 동물일 수도 있었다.

먼 바다에서 배회하던 굶주린 상어가 살 냄새를 맡고 슬그머니 다가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수면이 가슴 위쪽을 넘고부터는 익숙하던 현실의 시간이란 것이 돌연 사라져 버렸다.

출렁이는 파도가 목을 물어뜯기 시작하자 시간은 정지하고 다만 생(生)과 사(死)가 하나의 줄 위에서 이리저리 오락가락하는 공포스런 혼돈의 순간이 있을 뿐이었다.

용운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고통을 참으면서 필사적으로 주절거렸다.

“매일 아침마다 아이들은 구걸할 지역을 왕초로부터 배당받았어. 늘 일정하긴 했지만 고참들은 시내 중심가로 나가고 신출내기들은 변두리를 돌며 구걸을 했지. 국물을 얻기는 싶지 않았기에 최고참급이 되어야 깡통에 담긴 국물과 건더기를 먹을 수 있었어…… 거지들이 구걸한 수입물은 원칙적으로 공동재산이므로 계급에 따라 차등을 두고 공동분배를 했어. 그러므로 구걸한 것은 모두 내놓아야 했고, 만일 조금이라도 뭔가를 숨기고 있다가 발각되면 죽도록 얻어터졌지…돈만큼은 왕초를 비롯한 최고참급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어.”

필사적 주절거림

“감시와 검사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돈을 숨긴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어. 거지 사회도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통하고 있었지. 돈이 모이면 최고참급들은 인간 대접을 한번 받아보겠다는 마음속의 꿈을 술집에 가서 이뤄보려고 했어. 목욕을 하고 이발을 마친 왕초들은 으슥한 밤이면 슬슬 술집으로 들어갔지. 돈을 보여 주면 거지들도 환락가의 여인들로부터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더라. 그럴수록 돈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밑에 거느린 신출내기들을 폭행하며 독촉하고 심지어 도둑질을 강요하게끔 되었어.”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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