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정부는 항상 세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돈이 없다"면서 만만한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기 일쑤다. 그런데 정작 돈을 내야 할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회피하고 있다.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까지 정부가 걷지 못한 세금은 40조원에 이른다. <일요시사>는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을 토대로 체납액 5억원 이상의 체납자를 추적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46화는 6000억원이 넘는 세금을 체납한 금지금업자들이다.
국세청이 공개한 고액체납 법인 가운데 체납액 기준 1위에 올라 있는 업체는 어디일까. 흔히 부도를 맞은 대기업을 떠올리기 쉽지만 기대와 달리 중소도매상이 자리를 꿰차고 있다.
부동의 1위인 삼성금은은 2003년부터 부가가치세 등 14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국세청이 거둘 세금은 1239억1300만원이다. 삼성금은은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에도 올라 있다. 2005년 7월부터 주민세 등 4건의 세금을 체납했고, 체납한 세금은 2억1900만원이다.
1∼5위 올라
삼성금은은 이른바 '금지금' 무역업체다. 금지금은 무역용어로 순도 99.5% 이상의 금괴를 가리킨다. 요즘 말로 하면 골드바다. 삼성금은의 2003년 기준 매출액은 5800억원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삼성금은의 법인등기부상 대표는 '박덕순'으로 확인된다. 반면 실제 운영은 동생 박모씨가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부가가치세 등 수백억원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2008년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국세청이 공개한 체납 법인 가운데 체납액 기준 상위(1∼5위)에 올라 있는 업체는 과반 이상이 금지금 무역업체다. 먼저 3위를 기록한 골드매니저는 2004년부터 부가가치세 등 4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체납 세금은 940억1000만원이다. 5위에 오른 경빈쥬얼리도 2001년부터 부가가치세 등 21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국세청이 과세한 세금은 647억500만원이다.
2009년 12월 국세청이 발표한 '고액체납자 신규 명단 상위 10명'은 금지금업자들이 절반을 채웠다. 엘엠골드의 대표 이만근씨(부가가치세 등 4건·560억원), 대신골드의 대표 윤태영씨(종합소득세·454억원), 신세계골드의 대표 한주영씨(법인세 등 2건·320억원)가 나란히 1·2·3위로 나타났다. 남은 2명의 체납자도 각각 금지금업자로 소개됐다.
특히 대신골드는 법인 명의로 458억3500만원(법인세 등 10건)의 국세를, 28억3600만원(주민세 등 10건)의 지방세를 추가 체납했다. 이밖에 고액체납자 7위인 동화금은(부가가치세 등 4건·576억7900만원), 9위인 삼정금은(부가가치세 등 14건·495억3400만원) 등의 체납액까지 더하면 금지금업자들이 떼먹은 세금은 6000억원을 훌쩍 넘겼다.
관련 업체들에 대한 유의미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다. 대부분 폐업한데다 돈을 벌 때에도 유령회사를 동원해 이른바 ‘폭탄거래’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귀금속 거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불법 금지금업자들은 2008년 무더기로 적발됐다. 국세청은 세무조사를 받은 업체 가운데 90%를 형사 고발했다.
당시 적발된 업자 가운데는 박지만 EG 회장의 친구로 알려진 신삼길 전 삼화저축은행 회장도 있었다. 한 검찰 관계자는 "폭탄거래는 각각의 업체를 따로 떼어서 놓고 보면 이해되지 않는다"라며 "이런저런 업체가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원 판결문 등을 인용한 불법 금지금거래 사건 경위와 범행 수법은 다음과 같다.
개인·법인 체납 상위권 "거미줄처럼 얽혀"
바지사장 앞세워 회피…해외도피 중 덜미도
정부는 2003년 7월1일 일정 자격요건을 갖춘 금지금업자에게 부가가치세를 면제해주는 '면세 금지금 제도'를 도입했다. 당초 취지는 밀수 일변도의 금지금 거래를 양성화하고 왜곡된 유통체계를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당수 업자는 이 제도를 악용했다. 금 도매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삼성금은 등 금지금업체는 '수입업체 → 1차(도매)업체 → 폭탄업체(일명 바지업체) → 쿠션업체 → 바닥도매업체 → 수출업체' 등의 복잡한 유통구조를 만들어 정부를 기망했다.
구체적으로 금지금 거래에서 생긴 돈은 수출업체로 입금돼 다시 수입업체로 돌아갔다. 중간 거래 과정에서 폭탄업체는 면세 제도를 악용해 금지금을 도매가로 구입하고 이를 쿠션업체에 넘겨 부가가치세를 챙겼다.
이 같은 방식으로 돈을 만든 폭탄업체는 폐업 처리되며 쿠션업체는 폭탄업체가 폐업 전 끊어준 세금계산서를 이용해 자신들이 낸 부가가치세를 정부로부터 면제 받는다. 쿠션업체는 다시 바닥도매업체로 금지금을 넘긴다.
금지금을 받은 바닥도매업체는 수출업체로 물건을 넘기고, 수출업체는 다시 해외로 금지금을 판 뒤 수입업체를 통해 금지금을 들여온다. 쉽게 말하면 '돌려막기'다. 또 궁극적으로는 수출업체가 정부로부터 가장 많은 부가가치세를 환급받게 되는 데 이는 폭탄거래의 주요 자금줄이 된다.
도매에서 시작해 소매를 거쳐 수출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득은 폭탄거래에 가담한 각 업체가 일정한 비율로 분납 받는다. 이른바 '전주'로 불리는 금지금 결제업자는 단기간 내에 최대한 많은 양의 금을 확보해 유통한다. 일반적으로 전주는 수입업자와 수출업자를 겸한다.
특이한 점은 이 같은 폭탄거래가 불과 하루 사이에 벌어진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허위거래다. 폭탄업체, 쿠션업체는 대부분 문서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회사다. 당연히 국세청은 폭탄업체, 쿠션업체의 과도한 이득을 의심하게 되는데 주로 폐업 처리된 폭탄업체가 모든 책임을 떠안는다.
폭탄업체 운영자는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해 소위 '바지사장'을 섭외한다. 다른 중개업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과정에서 전주는 폭탄업체와 거래한 중개업체를 방패막이로 세워 당국의 추적을 회피한다.
예를 들어 삼성금은은 J무역, K골드, N물산, S아이피, D금은, L무역 등의 폭탄업체를 앞세워 700억원이 넘는 세금을 부당 편취한다. 그런데 삼성금은은 중개회사에 불과하며, 수출업체인 G골드의 방패막이로 활용된다. 나아가 G골드는 다른 금지금 거래에서 수출업체가 아닌 중개회사의 역할을 맡는다. 이처럼 복잡한 사건 구조 때문에 당시 수사기관은 이들의 연관성을 묶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문제는 사건에 연루된 금지금업자가 폭탄거래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자금난을 이유로 싼값에 금을 유통하고, 시세차익을 올리기 위해 금을 재매입한 것이 범죄행위는 아니라는 판결도 나왔다. 현재 폭탄거래에 연루됐던 업자들은 대부분 풀려난 것으로 전해진다.
피해자는 서민
지난 2008년 검찰은 금지금 폭탄거래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41명에게 실형을 선고해 그 합계가 징역 161년6개월에 이르렀다"라고 설명했다. 또 "벌금 액수만 2조4627억원에 달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벌금을 내지 않고 태국 등 해외로 도피하는 업자가 속출했다.
당시 국세청은 2조원에 가까운 세금을 추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직 수천억원에 달하는 체납 세금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해외로 도피한 업자 가운데는 올해 들어서야 본국으로 송환된 사례도 있다. 결과적으로 시민이 성실히 납부한 세금은 일부 금도매상의 도피자금으로 쓰였던 것이다.